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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망속 분전 특공대 전과|「적성리 전투」의 비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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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현지 주민들의 말로만 전해 오던 적성리 전투(경북 문경군 동로면)의 분전 기록이 22년만에 햇빛을 보게 됐다.
미제 10군단 배속 한국군 특별 공격대(대대장 배동걸 소령·작전 참모 손장래 대위)는 51년 1월 12일에서 13일까지 이틀 동안 북괴군 제10사단 3천병력과 맞서 혈전을 벌인 끝에 적 1천57명을 사살하고 9백명이 부상, 사실상 적 사단을 전멸시킨 큰 공을 세웠으나 지금껏 주민들에게만 기억되었던 것.
이 비화가 올해 처음으로 국방부 전사 편찬 위원회의 인정을 밤아 전사에 실리게 되어 22년만에 영광을 확인 받은 것이다.
51년 1월 21일은 영하 18도로 추웠다. 하오 2시쯤 적성리 분지에 중장비를 갖춘 한국군 1개 대대 4백여 병력이 조용히 스며들어 언 땅을 파서 개인호를 구축하고 야영했다.
배동걸 소령이 지휘하는 특별 공격 대대였다.
이날 밤 특별 공격 대대는 사면 능선을 포위한 북괴군 10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낡은 경찰 지서 건물을 지휘소로 하여 특별 공격 대대는 밤새껏 총격으로 맞서 싸웠고 이튿날도 하루종일 총격전과 곳에 따라서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북괴군은 엄청난 손실에 더 공격을 못하고 13일 하오 도주했다. 부락민들이 나와 세어 본 결과 적의 시체는 1천 57명, 부상자는 9백여명에 달했고, 아군의 피해는 전사 3명에 부상 4명뿐이었다.
당초 이 부대는 50년 9월 7일에 「유엔」 군의 수색과 반격 작전에 도움이 되도록 한국군 4백명을 차출 편성한 것으로 일본 「요꼬스까」에서 특수 훈련을 받고 돌아와 흥남 철수 작전에 참가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함에 따라 조치원∼장호원, 삼척∼영월을 잇는 방어선인 황오선에 투입되었던 것.
이때 패잔병인 북괴 10사단 병력 3천여명이 최후 방어선의 배후를 위협한다는 정보에 따라 이 특별 공격대가 적성리에 돌려졌던 것이다.
당시 이 부대에 배속했던 4명이 미군 고문은 이 분지에 주둔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이동을 주장했으나 배 소령은 이 분지에서 적을 끌어들여 백병전을 벌여 한번에 무찌르자고 우겼다는 것이다.
이때의 싸움에는 부락민 1백여명이 죽창·곡괭이를 들고 참가했었고 전투 중 13일에는 총알이 떨어져 전대원에게 10발씩 주고 5m앞까지 접근했을 때만 쏘라고 명령했는데 전대원이 이를 잘 지켜 적을 끝까지 유인, 섬멸했다는 것이다.
이 큰 승리의 아침 당시 군단장 「아먼드」소장이 달려와 『기적적인 승리』를 격찬, 부대 표창과 함께 20명이 미국 동성·은성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국군 전사에 남지 않아 이제껏 주민들의 이야기에만 전해 왔으며 부락민들이 스스로 비를 세워 전공을 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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