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민주주의에 지름길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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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5일(한국시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의 연설 도중 한 한인 청년(윗줄 오른쪽 둘째)이 “이민자 추방을 중단하라”는 돌발 발언을 하고 있다. 현지 언론은 그가 샌프란시스코주립대 대학원생 홍모(24)씨라고 보도했다. 홍씨는 11세 때 어머니와 미국으로 건너와 현재 서류미비 이민자 신분이다. [샌프란시스코 로이터=뉴스1]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민주당 전국위원회 기금 모금 행사에서 연설하던 중 소란이 일어났다.

 청중석에서 한 한인 청년이 “대통령은 즉각 행정명령을 발동해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추방 행위를 중단시켜라”고 외쳤다. 행정명령이란 의회에서 법이 통과되지 않아도 대통령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조치를 의미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불법체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추방을 유예한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적도 있다.

 현재 미국에는 1100만여 명의 불법 체류 이민자가 강제 추방될 위험에 처해 있다. 이들을 구제하는 내용을 담은 이민법이 의회에 제출돼 민주당이 다수인 상원에선 통과됐지만 야당인 공화당이 다수인 하원에서 발목이 잡혀 있 다. 이 청년이 행정명령을 발동하라고 요구한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주변 사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청년이 연설을 계속 방해하자 오바마 대통령은 이 청년을 향해 미국의 민주주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뼈있는 한마디를 했다. “많은 사람은 나보고 행정명령서에 서명해 의회를 무력하게 만들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옳지 않다. 미국에는 헌법이 있고 삼권분립의 원칙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정치에는 지름길이 없다”며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게 순서”라고 강조했다. 이어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모인 것도 그 때문”이라며 “때론 더디고 힘들지라도 선거는 민주주의를 위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에 청중석은 조용해졌다.

 대통령에 재선된 뒤 1년도 되지 않은 지금 오바마 대통령은 위기에 처해 있다. 워싱턴포스트(WP)와 ABC 방송이 지난 14~17일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의 국정수행 방식을 지지한다는 응답자는 42%에 그쳤다. 10월 조사에 비해 6%포인트 하락했다. WP 조사에선 2009년 첫 취임한 이래 가장 낮다. 벌써부터 레임덕(집권 후반기 권력누수 현상)이 시작됐다는 진단이 잇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정치엔 지름길이 없다”고 강조했다. 국면 전환용 카드를 쓰거나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 의회를 우회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셈이다. 최근 지지율 하락에는 대선 공약이었던 오바마케어(건강보험개혁법) 실시를 둘러싼 잡음이 주된 원인이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이달 초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나는 완벽한 대통령이 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오바마케어 시행 과정에서의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 대신 내년 11월로 예정돼 있는 중간선거를 통해 의회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날 샌프란시스코행도 그 일환이었다.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구재회 한미연구소장은 “미국 민주주의가 힘이 있는 건 선거의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라며 “의회에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건 다수결의 원리가 작동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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