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문화의 형성과정|중앙대 국제문화연구소 학술심포지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중앙대 국제문화연구소(소장 백 철)는 7일 동 교에서「신문화 형성과정에 대한 검증」을 주재로 학술「심포지엄」을 가졌다.
인문과학(김영모), 사회과학(유인호), 문학(이가형)의 3분야에서 주제를 다룬 이「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은 한국의 신문화가 일본의 식민 화 과정에서 타율적 힘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으로, 주체적 담당자가 없는 모방문화였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1876년 강화조약을 전후하여 일본화 시키는 식민정책의 결과로 신문화는 도입되었고 근대적 성격도 갖지 못했다는 것.
이것은 또 일본이 명치시대에 서구문화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인 그대로의 상황을 한국에 적용시킨 것이었고, 그 내용이 서구문화의 일본식「재탕」이었으나 전통문화와의 갈등과정도 없이 그대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신학문의 도입은 1895년 유길준의『서유견문』에 의한 것으로 본 김영모 교수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정치학·법률학·철학·종교학·언어학·병학·박고학·화학·격물학·농학·직물학·동물학·의학·산학·광물학·천문학·지리학·교육학·사회복지 등의 개념적 소개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후 관비유학생들이 동경에서 발간한「친목회보」(l897년간)에서 소개되기 시작하여 1906년의「소년한반도」와 1908년「기호흥학회 월보」에서는 체계적인 서술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자료를 분석한 김영모 교수는 개화기의 신학문이 ⓛ관료지식인에 의해 도입되었으며, 대부분 이들은 구원이었다는 점과 그들이 하급자일 때였다는 점 ②신학문의 체계적 소개는 1900년대의 유학생에 의한 것인데, 그 내용은 일본이 받아들인 서구문화의 간접적인 수입이었다는 점등을 지적했다.
식민화의 방편으로 들어온 신학문이 전통적 지식인과의 마찰을 겪지 않은 채 받아들여졌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경제관계도 마찬가지다. 근대적 경제관계형성의 기본요건인 토지제도 및 화폐제도가 식민자의 수탈을 제도면 에서 뒷받침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전제한 유인호 교수는 이러한 제도의 정비를 통해 한국 안에서의 그들의 상 역 활동의 제약을 없앴다고 말했다.
이러한 터전을 닦기 위해 일본은 1876년을 전후한 20년간에 한국에 대해 다양한 수단으로 접근해 왔는데, 결국 무력으로 그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
이와 같이 일본 독점자본의 요구에 의해 갖추어진 근대적 제 요인은 그 뒤 한국을 수탈함에 알맞은 제 기구를 준비함으로써 정착화 했다고 전 교수는 보았다.
신문학에 있어서의 일본의 영향은 강제성을 띠지 않으면서도 결정적이었다고 이가형 교수는 주장했다.
한국의 신문학 개척자들은 일본유학생들이었고 그들은 일본문학, 또는 일본에 소개된 외국문학을 통해서 문학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신문학형성과정은 몇 십 년 후 한국의「모델」이 되었다.
신소설의 창시자 이인식은 일본의 정치소설에서 그「모델」을 답습했으며, 일본의 그것은 서양의 정치소설을 수입한 것이다.
1883년 시야룡계의『경국미담』은 1906년 그의『혈의 누』로 나타났다. 한일합방 이후 이것마저 신판소설로 전락되고 말았다.
최남선의 신시는 또한 일본의 75조의 신체시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일제하에 그대로 눌려 있다가 해방을 맞은 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