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레가 고마울 때도 있더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50호 28면

너새니얼 호손(1804~1864) Nathaniel Hawthorne 대학 졸업 후 작가의 길을 모색했으나 생활고를 못 이겨 고향인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세관 검사관으로 일했다. 1849년 해고당한 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이듬해 첫 장편소설 『주홍글자』를 발표했고, 영국 영사로 4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허먼 멜빌이 그의 천재성을 기려 『모비딕』을 헌정했다.

나는 원래 공상과학(SF)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터라 ‘그래비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극장 문을 들어설 때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우주 공간의 광활함과 공포감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롱테이크(long take) 기법으로 촬영한 장면이었다. 아주 멀리 지구 전경이 들어오는 넓은 앵글에서 시작해 정면을 바라보는 샌드라 불럭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뒤 점점 다가가다 마침내 헬멧 안으로까지 들어가 거꾸로 그녀의 눈에 비치는 우주를 포착해 다시 보여주는 컷이었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48>『주홍글자』와 너새니얼 호손

소설에서는 이런 롱테이크식 묘사를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주홍글자(The Scarlet Letter)』는 특히 두드러진다. 17세기 식민지 뉴잉글랜드의 감옥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다.

음산하고 침울한 감옥 건물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고 무성한 잡초들이 자라고 있다. 그 한쪽으로는 6월을 맞아 보석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들장미 덤불이 나타난다. 감옥 앞 풀밭의 처형대 주변에는 군중이 모여 있고, 이들의 웅성거림 속에 감옥 문이 활짝 열리더니 한 사내가 젊은 여인을 끌고 나온다.

태어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는 젖먹이를 안고 있는 그녀의 웃옷에는 화려한 주홍빛 헝겊에 금실로 꼼꼼하게 수를 놓은 A자가 보인다. 간통죄(Adultery)를 범한 헤스터 프린이다. 그녀를 응시하는 수많은 시선이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로 무자비하게 쏠리는 가운데 그녀의 시야에는 희미한 이미지들이 어른거린다. 영국의 고향 마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나이 많은 전 남편의 얼굴….

형틀이 놓여 있는 처형대는 그녀에게 행복했던 소녀 시절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 여정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조망대가 되고, 기억의 회랑은 계속 이어지다 다시 추상같은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는 청교도 식민지의 투박스러운 시장 터로 돌아온다.

『주홍글자』의 롱테이크 장면은 이처럼 광대한 우주가 아닌 미로와 같은 인간의 마음을 비춰준다. 헤스터는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라는 온갖 압력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주홍글자를 단 채 딸 펄과 함께 묵묵히 살아간다. 그녀의 간통 상대는 마을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젊은 목사 아서 딤스데일인데, 자신의 죄를 차마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죄의식으로 인해 나날이 쇠약해져 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더욱 감동적이고 호소력 있는 설교를 한다.

뒤늦게 미국으로 온 헤스터의 남편 로저 칠링워스 노인은 신분을 숨긴 채 의사로서 병약한 목사의 곁을 지키며 복수의 기회를 엿본다. 그러던 어느 날 딤스데일이 책을 읽다 깊은 잠에 빠지고, 칠링워스는 목사의 앞가슴을 풀어헤친다. 그 순간 노인의 표정에서는 무시무시한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모진 고행으로 인해 조금씩 죽음에 다가서는 딤스데일을 보다 못한 헤스터가 마침내 칠링워스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자 딤스데일은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인은 아니오. 타락한 목사보다 더 흉악한 죄인이 있소. 그 사람의 복수야말로 내 죄보다 더 무서운 죄요. 냉혹하게도 그 사람은 마음의 성역을 범했소.”

『주홍글자』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은 딤스데일이 7년 전 헤스터가 섰던 그 처형대 위로 올라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이다. 새로운 총독의 취임을 경축하는 날, 목사로서 축하 설교를 하는 영광의 절정에 오른 바로 그 순간, 그는 계속 침묵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린 것이다.

“헤스터가 달고 있는 주홍글자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보고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 낙인은 그에게도 있습니다. 신의 눈이 그것을 보았지요! 그러나 그는 간교하게도 그것을 사람들에게 숨기고 이 죄악의 세계에서 자신은 너무 순결하여 쓸쓸한 것처럼 여러분 사이를 걸어 다녔지요. 지금 그는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이 무서운 증거를 보십시오!”

딤스데일은 목사복의 앞가슴 띠를 떼어버리고는 쓰러진다. 그리고 헤스터와 펄의 곁에서 숨을 거둔다. 복수할 대상이 사라진 칠링워스도 1년 뒤 죽으면서 전 재산을 펄에게 남긴다. 펄은 헤스터와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그런데 헤스터는 다시 돌아온다.

“이곳에 그녀가 지은 죄가 있었다. 이곳에 그녀의 슬픔이 있었고, 이곳에 그녀의 더 많은 참회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돌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그토록 우울한 이야기를 하게 했던 그 상징을 자발적으로 다시 달았다.”

상처받고 불행한 사람들이 무거운 마음의 짐을 부둥켜안은 채 헤스터의 오두막을 찾아왔고, 그녀는 힘닿는 데까지 이들을 도왔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진정한 삶이었던 것이다.

영화 ‘그래비티’의 마지막 장면에서 샌드라 불럭은 지구로 귀환해 지면에 발을 디디면서 기뻐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중력이 인간에게 제약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헤스터에게 주홍글자가 고통과 죄악의 낙인이 아니라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는 상징이 된 것처럼 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