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조선인 징용자들 넋 위로하는 마음이 내 컬렉션의 밑바탕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1 기부의 철학이 만들어진 통학길. 아키타 센슈 공원의 계단에 서 있는 하정웅씨.
2 모교 아키타공업고등학교에 기증한 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다.
3 이우환의 ‘점으로부터’(1974),Glue and mineral pigment on canvas,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4 ‘최승희 - 빛을 구하는 사람’, 119.5x84.5cm,작가미상,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5 앤디 워홀의 ‘세리크래피’(1972), 100x110cm,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6 억울하게 숨진 조선인 징용자의 넋을 위로하는 다자와코 히메관음상 앞에서.
7 전화황의 ‘미륵보살’(1976), 캔버스에 유채, 90.8x89.1cm,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8 가와모토 전기상사 창업 시절(1967년). 9 사이타마에 세운 두 번째 전파상 앞에서 부인과 함께. 지금은 동생에게 물려줬다.

한두 점도 아니고 1만 점이다. 평생 모은 미술품을 고국의 지역 미술관 여러 곳에 기증했다. 시각장애인들이 모일 건물이 없다 하자 땅과 돈을 기부해 회관을 짓게 했다. 일본 강점기에 끌려와 이름도 없이 죽어간 무연고 넋을 달래려 일본 전역을 돌며 명단을 찾아 절에 안치했다.

재일동포 기업인 하정웅(74)씨의 일생은 이렇듯 기증과 기부라는 단어로 촘촘하게 덮여 있다. 그의 연보를 보면 기업을 일궈 기반을 잡은 30대 중반 이후는 오로지 남에게 뭔가 주는 일로 나날을 보낸 것처럼 보인다.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요, 마음먹었다고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하늘이 내린 운명에 땅에서 땀으로 일군 노력이 맞아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미술품 기부천사 하정웅씨는 어떻게 그 많은 작품을 모으고 또 아낌없이 줄 수 있었을까.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으로,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일본 집과 한국 사무실을 오가며 바쁜 그를 동행했다. 마침 16일 광주시립미술관에서는 그의 기부 활동을 돌아보는 ‘컬렉터 하정웅, 나눔의 미학’전이 막을 올렸다. 내년 3월 16일까지 이어지는 이 자료전은 진정한 기부정신이 무엇인지,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어떻게 피어나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가 기증한 미술품 순회전인 ‘전국 시도립미술관 네트워크, 하정웅컬렉션 특선전-기도의 미술’도 8개 미술관을 돌며 2015년 2월까지 계속되니 그의 메세나 활동이 이제야 제대로 조명되는 모양새다. 미술품 수집가에서 문화 활동가로 재평가받고 있는 하정웅씨의 육성을 듣는다.

카네기 같은 자선사업가 꿈꿨던 아키타 현 시절
“이곳이 내가 3년을 꼬박 걸어다니며 생각하고 꿈꾸던 길이오. 기차를 타려면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역까지 뛰어가야 했지요. 열차 타는 통학 시간만 편도 3시간, 하루 6시간이었으니 내 철학은 기찻길 위에서 피어났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일본 아키타시 역에서 10분 거리인 센슈 공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하정웅씨는 마중 나온 차를 타고 여기부터 가자고 했다. 모교인 아키타 공업고등학교까지 가는 공원길에는 비가 뿌리고 있었다. 대지주가 살았던 구보타성의 유적에는 만추의 낙엽이 흩날렸다.

“커피값이 없어서 다방에는 못 가고 여기 벤치에서 데이트를 했죠. 어려서부터 화가가 꿈인지라 고등학교에 들어오자마자 회화반을 만들어 회장을 했어요. 인기 좋았죠. 당시 우리 학교에 여학생이 딱 4명뿐이었는데 다 회화반에 들어와 동급생들이 얼마나 질투를 했던지.”

그는 이 길을 오가며 자연 속에서 대화하는 걸 즐겼다고 했다. 그림의 소재도, 먼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여기서 찾았다. 마지막 기차가 떠나는 시각까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었던 곳도 여기다.

“카네기 자서전도 기억나요. 돌이켜보면 아마도 카네기의 일생에서 내 기부 정신, 메세나의 싹이 트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는 점심 먹을 돈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나중에 돈을 벌면 카네기 같은 자선사업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었던 거죠.”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소질도 있었다. 당시 회화반 지도교사가 일반인 대상 종합미술전에 학생 하정웅의 그림을 대신 출품해줬는데 교사 작품은 떨어지고 하정웅의 그림만 입상하자 “네가 내 선생님이다” 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아마도 그때 경험이 내 미술품 수집의 뿌리가 됐을 겁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상 어쩔 수 없었던 안타까움도 무의식적으로 미술을 가까이하게 만들었고요.”

일제강점기에 고향 영암을 떠나 일본으로 이주해온 선친은 공사장 인부를 거쳐 마차를 끄는 마부였다. 사는 게 너무 힘들었던 모친은 장남인 하정웅씨 손을 잡고 호수를 찾아 자살 시도도 몇 번 했지만 아들만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며 쌀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며 뒷바라지를 했다.

“그때는 아키타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너무 싫어했어요. 오늘은 살아 있지만 내일은 살 수 있는가, 매일 한숨이었죠. 동생 셋을 데리고 학교에 가면 급우들이 데리고 놀아주곤 했어요.”

아키타 근교 예술촌인 와라비좌에서는 학교 동창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 추억을 회상하며 하정웅씨가 그렸던 그림 얘기들을 나누던 친구들은 그가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의젓하고 지도력 있던 조숙한 학생이었다고 칭찬했다.

와라비좌 민족예술연구소 소장인 차다니 주로쿠(72, 茶谷十六)는 “하정웅을 만나고 내 인생이 변했다”며 입을 열었다. “그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어요. 내가 대학에서 고려사를 공부하고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좋아하게 된 바탕에 하 선생이 있죠. 내가 보기에 하정웅 컬렉션의 원점은 여기, 아키타입니다.”

아키타 센보쿠시 교육장을 맡고 있는 구마가이 도오루(熊谷徹)는 하정웅씨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곳 가쿠노다테 공립고등학교에서 내년부터 한국어 수업을 선택과목으로 채택했어요. 아키타 현에서 최초 일입니다.”

하정웅씨도 감회에 젖었다. “고맙습니다. 아키타의 환경과 사람, 그 인연이 날 키웠어요. 그림의 길에 들어선 것도, 한국과 일본의 가교 구실을 하도록 만든 것도 이 땅입니다. 제 삶을 다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보던 제작진이 드라마 ‘아이리스’의 무대로 이곳을 선택했을 정도니까요.”

움켜쥔 손 펴야 집어들고, 나눠주고, 다시 채우죠
하정웅씨는 1959년 3월, 아키타 공업고등학교 졸업장만 달랑 들고 도쿄로 향했다. 당시 취업이 잘 되던 공고 출신에 교장의 추천서까지 있어서 취직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자신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가난한 조선인이었다. 어디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일본 사회에서 받은 차별과 냉대에 대해 늘 과묵했던 그이지만 이 대목에선 속내를 털어놨다. 징용에 끌려와 개죽음을 했던 무연고 조선인들의 영혼을 달래는 일에 그가 열심인 까닭이다.

“일당 260엔을 받는 임시직으로 일하며 밤에 디자인학교를 다녔지요. 얼마나 못 먹고 힘들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앞이 안 보이는 겁니다. 제가 나중에 광주 지역 시각장애인들을 돕는 일에 발벗고 나선 데는 이 20대 초반의 아픈 경험이 바탕이 됐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하정웅씨의 삶은 신기하게도 이 말이 딱 들어맞는 몇 번의 행운으로 전기를 맞는다. 위기가 기회가 되고,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는 극적인 반전이다.

“결혼을 하고 1964년에 가와구치시에서 가와모토(河本) 전기상사를 설립했어요. 이게 참 재미있는 게 신혼살림을 샀던 가게 주인이 나한테 사기를 쳐서 울며겨자먹기로 인수한 가전제품 상점이었는데 할부를 해주고 나름 열심히 했더니 하루아침에 부쩍 커지더란 말이죠.”

마침 도쿄 올림픽이 열리면서 집집마다 텔레비전을 들여놓던 호황기였다. 돈을 가마니로 쓸어 담을 만큼 장사가 잘 됐다. 건물 임대업으로 넘어갈 때도 사기를 당했는데 그게 또 역전돼 엄청난 부를 일궜다. 그렇다면 미술품 컬렉션의 시작은 그 돈 덕이었을까. 아니었다. 그의 두통이 일등 공신이었다.

부인 윤창자씨가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남편은 기분이 우울하거나 머리가 아프면 약을 먹는 게 아니라 백화점으로 산책 나가는 게 해결책이었어요. 당시 일본 백화점들은 대부분 화랑을 두고 있었는데 물건 구경보다 그림을 보러 다닌 것 같아요. 하루는 유명한 일본 화가 전시가 열린다고 갔다가 그 옆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재일동포 화가를 만난 거예요. 한 점도 못 팔았다고 하길래 우리가 한 점 샀지요. 그게 인연이 돼서 그 화가의 작업실도 가고요. 그 뒤로 남편은 고생하는 조선인 화가들의 그림 세계를 알리고 그들을 도와주는 일에 나서게 됐어요.”

하정웅 일가가 미술품 컬렉션의 길에 들어서게 만든 그 화가의 이름은 전화황(1909~1996)이었다. 백화점 전시에서 본 전화황의 1976년 작 ‘미륵보살’은 하정웅씨의 컬렉션 제1호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의 얼굴이자 무연고 조선인의 초상이었다.

“딱 보는 순간, 가슴이 쿵 했어요. 저거다 싶었죠. 특히 일본에 앉아 신문으로만 읽던 한국전쟁이 떠올랐어요. 왜 이런 싸움을 할까. 한 핏줄이 어째서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가. 미륵보살이 괴로운 제 심정에 평화를 가져다 줬어요. 제 컬렉션에 ‘기도의 미술’이란 제목이 붙게 된 이유지요. 미술이 뭘 해줄 수 있을까 묻는 분들에게 저는 말합니다. 미술은 기도라고요. 평생 저를 지켜준 미술을 모두와 나누는 것, 저에게 미술품 기부는 저를 살려준 세상에 대한 보은이고 감사입니다. 저더러 메세나 활동의 가장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제가 입은 은덕을 조금이나마 갚는 심정인 거죠. 제가 자신하는 건 이런 모든 실천이 머리로 배운 이론이 아니라 몸을 굴려 체득한 거라는 점입니다. 제 컬렉션의 기본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허무하게 죽어간 조선인 징용자들을 위한 위령의 마음입니다.”

하정웅씨는 말한다. 혹시 지금 두 손에 뭔가를 꽉 움켜쥐고 있느냐고. 그럼 죽는다고. 한 손을 펴야 다른 것을 또 집어들 수 있다고. 펴서 나눠주고 다시 채우고 또 비우고. 그는 오늘도 ‘두 손의 철학’을 전파하려 한국과 일본을 부지런히 오간다. 하정웅 컬렉션이 우리에게 전하는 건 1만 점이란 숫자가 아니라 그 비움의 철학이다.

아키타현(일본)=글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 메디치미디어·광주시립미술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