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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해서 암행 일기의 표지>|숙종 때 암행어사 박만연의 행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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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월23일 계속】신규현과 한참동안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주인은 일어서서 경대하며 『임생원께서 어떻게 알고 오셨읍니까』하고 묻자 그는 『이웃 사람에게 듣자니 어떤 행차가 자네 집에 들었다기에 혹시 서울 손님이 아닌가 싶어 왔네』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나에게도 말을 건넸다.
어디에 살며 어디로 가는 길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의연하게 충청도에 사는데 흉년으로 먹을게 없어 관서 지방으로 가 걸대 할 심산이라고 일부러 촌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자청해서 자기 이름이 우요 관향이 풍천이라 소개하고 서울에 사는 판서 임상원·임서흥·임윤원 등과 일가 친척인데 내가 그 사람들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본디 시골 사람임을 자처했다.
『서울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이라 서울에 임 판서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되 면직이 없소이다.』
이 같이 응수하면서, 도리어 말머리를 돌려 이것저것 다른 일들을 물어봤다.

<거짓 성명 대주고>
그랬더니 임우라는 사람은 자기가 벌써 통성명을 하였음에도 내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데 대해 꽤 불쾌하게 여긴 모양으로 재차 이름을 물었다.
나는 지껄이다 보니 답례할 겨를이 없었다고 핑계하며 박중이라 거짓 이름을 대었다.
임우는 서로 이야기하면서 자주 내 눈치를 살피더니 문득 내 신분을 재확인하려는 듯 공손하게 물었다. 『내가 지난해 7월에 임서흥 집에 갔었을 때 임 판서와 모두 같은 자리에 앉아 장기를 두고 있던 사람의 모습이 존객과 흡사한데 혹 그 분이 아니십니까.』 바로 기억하는 지적이다. 그러나 나는 웃으면서 임 판서나 임서흥이란 사람을 평소에 알지도 못하는 사이거늘 어찌 그 집까지 가서 대국을 한단 말이냐고 시치미를 때었다. 『아마도 임생원의 착각일 겁니다.』
내가 틈을 안주고 딴 얘기를 꺼냈으나 임우는 끝내 의아해 하는 눈치를 살필 수 있었다. 그는 밤이 깊어 물러가면서 비가 개지 않을 듯 하니 박생원께서는 조반 후에 떠나도록 애써 당부하며 아침에 다시 오마고 하였다.

<"이 밤 묵고 가시오">
주인 신달현은 일행의 행차를 만류할 의사가 있지만 이 자리에서 감히 자청하지 못하는 성싶었다. 주인은 임우에게 눈짓하여 재차 만류토록 청하기에 나는 주인의 간청이라면 아침에 형편을 보아 거동하리라 마음먹었다.
3월24일 비가 오다. 새벽닭이 운 뒤에도 비는 그치지 않고 하늘은 희부옇는데 동이 트이려 하였다. 어제 그 임우가 내 행색을 눈치 챈 듯 싶어 아예 일찌감치 출발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주인이 안에서 뛰어나와 말머리를 가로막고 만류했다. 『흰죽이나마 준비되었으니 한술 뜨고 가십시오. 비도 아직 개지 않았는데 이 비를 무릎 쓰고 떠나다니 안됩니다.』
그의 말씨를 살피건대 말은 비록 간절한 것임에 틀림없으나 흰죽이 준비 돼 있다는 것은 거짓인 것 같았다.
나는 주인의 따스한 정에 매우 감복하였다. 한시가 바쁜 길이므로 부득이 우중임에도 떠나려는 것이니 굳이 잡지 말라고 치사하며 곧 떠났다.

<비 흠뻑 맞고 휴식>
10여리를 못가 비가 점점 더 쏟아져 옷이 흠뻑 젖어 버렸고 더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길가의 담이촌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은 너무도 협착 해서 마구간이라야 겨우 반간이요 또 땔나무조차 없어 주인은 밥이나 말먹이를 끊일 수 없다고 난처해했다.
나는 잠시 조반이나 먹고 갈 것인데 마굿간이 비좁다 해도 말 두 필이야 못 들어 갈리 없을 것이요, 나무 값도 서운찮게 지불할 것이니 어렵게 생각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양반을 대접하면 뒷날에 이로움이 있을 것인데 하물며 우중의 손님을 어찌 축객 하리오』하고 밥을 지어주었다.

<눈치 빠른 촌노>
오후엔 비가 약간 멎었다. 신천 동촌고손이리에 도착, 길가 촌사에 드니 백발의 노옹이 나와 맞이했다. 노인은 존객이 묵을만한 처소가 못 된다고 하며 안으로 안내하였는데 과연 봉창이 하나뿐인 어둡고 조그마한 방이었다.
주인은 내 앞으로 다가서서 한참 보더니 『존객께서는 반드시 벼슬을 하는 귀인이시지요』하고 말문을 꺼냈다. 나는 웃으면서 『노인께서는 그 무슨 망령된 말을 하십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글도 못하고 기운이 약해 무술도 닦지 못하였는데 무슨 벼슬을 하였겠읍니까. 주인은 무엇을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하니 노인은 『나는 못 속이십니다. 바른 말씀을 하셔야지, 그래 벼슬하는 분이 아니란 말이오? 노인은 자못 자신 있는 어투였다. <계속>

<이봉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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