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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지식을 정답이라고 우기는 한국 수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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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상언
런던특파원

제게는 고3인 아들이 있습니다. 학기 구성이 다른 영국 학교에 다니다보니 내년 6월에 대입 시험을 치릅니다. 2주 전에 아이의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진학 상담을 위해 학교에서 학부모들을 불렀습니다. 그날 경제 과목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주문한 ‘입시 대비 학습 요령’이 인상적입니다. “늘 내가 얘기해온 대로 이코노미스트(영국의 경제 전문 주간지)와 BBC방송 웹사이트의 비즈니스 섹션을 열심히 읽어라.” 경제적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영국과 유럽연합(EU)의 금리·경제성장률·실업률 변화의 추이와 관련 정책을 살펴보는 것은 필수라는 설명이 뒤따랐습니다.

 아이는 요즘 미국 하버드대 교수(정치철학) 마이클 샌델의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지정한 경제 과목 필독 도서 중 하나입니다. 책꽂이에는 다른 권장 도서도 놓여 있습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의 『세계화와 그 불만』, 역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 등이 보입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우수 학생을 모아놓은 특수 학교가 아닌 일반 고교입니다.

 영국 학교에도 교과서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입 시험에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다양한 교재를 개발합니다. 또 인기 대학의 입시에는 면접시험이 포함되는데, 지식의 암기 수준이 아니라 시각이나 사고력을 살펴보려는 질문이 던져지기 때문에 교과서만으로는 대비가 안 됩니다.

 남의 나라 교육 얘기를 꺼낸 까닭은 한국에서 시빗거리가 된 수능시험 세계지리 8번 문항 때문입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지역과 유럽연합의 총생산 규모를 비교하는 부분이 논란을 낳은 바로 그 문제 말입니다. 교육과정평가원에서는 ‘EU의 총생산액이 더 크다’는 지문을 옳은 것으로 선택한 답안이 정답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분란은 약 2년 전 NAFTA 지역이 총생산 규모 면에서 EU를 앞질렀다는 사실에서 비롯됐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NAFTA 지역의 총생산이 EU보다 큰 것으로 적혀 있는 기사가 쏟아져 나옵니다. 같은 내용의 정부 발표 자료도 많습니다. 어쩌면 요즘은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가원은 “교과서에 EU의 총생산이 더 큰 것으로 쓰여 있다”는 이유로 “정답에 이상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곧 ‘경전’입니다. 출제 위원들이 이 같은 변화를 몰랐다는 것도 충격적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경제협력체는 EU’라는 죽은 지식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면서, 이를 수험생들이 잘 암기하고 있는지 확인해보려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사회 과목 교사들이 조용히 있는 것도 특이합니다. 그 결과 ‘바담풍’을 ‘바람풍’으로 읽은 학생들만 억울하게 됐습니다. 한국 교육의 실상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이상언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