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식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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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피아노」의 시인은 누구인가?
①베토벤 ②쇼팡 ③모차르트.
이런 시험문제가 있었다. 이른바 객관식이라는 것의 한 실례이다. 실로 그 정답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출제자는 「쇼팡」에 「○」표를 해주기를 요구하고 있을 것 같다. 「쇼팡」의 『플로네이즈』같은 곡은 서사시적 환상에 넘쳐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름다운 서정적 정경의 작품도 없지 않다. 그러나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라고 그런 우아한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객관식」의 강요는 결국 도식적 사고방식의 결과로 나타나기 쉽다.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도식에 얽매인 자가 「쇼팡」의 그 극적이고 영웅적인 「폴란드」민족의 웅장한「리듬」을 쉽게 이해하겠는가.
최근 세칭 일류고교의 한 국어교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적이 놀란 적이 있었다. 작문 시간에 자유제를 주고 백지 한 장을 메우게 했다. 50분 동안에 그 백지를 다 채운 학생은 불과 20%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문장의 구성은 국민교생, 혹은 중학생의 그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더라고 한다. 왜 이런 광경이 벌어졌겠는가?
그 교사는 한마디로 ○×의 악습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말한다. 각급 학교의 모든 시험문제들이 한결같이 ○×식, 이른바 「객관식」이기 때문에 구태여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쓸 기회도, 필요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주어진 해답을 선택만 하면 된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교육방식은 그 원천을 캐보면 미국의 「프래그매틱」한 교육풍조에서 도입된 것도 같다. 그러나 정작 그곳의 교육은 평상시에 「프리·디스커션」(자유토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객관식」의 부작용을 충분히 중화시키고도 남는다. 개인의 인격과 유연한 사고는 그런 기회에 얼마든지 존중되고 또 북돋워 진다.
한 인간이 단세포식 두뇌를 갖게 될 때 그 비극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창의력에 스스로 한계를 긋는 일이다. 그런 획일주의적인 사고는 인간의 조건을 또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이 세계는 다양한 많은 사람들의 슬기에 의해 창조력이 개발되고, 또 움직여진다. 민주사회는 바로 그런 『다양의 조화』에 미덕이 있는 것이다.
올해 대학입시의 일반적인 경향이 종래의 「객관식」식상에서 벗어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주관식 문제야말로 『주 관있는 민주시민』에의 훈련을 닦는 첫걸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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