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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조의 「에너지」 1972년의 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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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문화의 흐름에는 엄격히 가름할 수 있는 매듭도 없고, 단기 또한 있을 수 없다. 있다면 그것은 그저 곡선 상에 그어진 진폭과 상승도의 차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1972년이라는 하나의 시점에 그어질 문화의 곡선이 한결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특히 60년대부터 현대문화를 가속적으로 위기의 상황에 휘몰아 넣었던 인소들의 「렘넌트」(잔재) 들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을 오늘의 상황 속에 몰아 넣은 것은 바로 인간의 정신이다. 이 똑같은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인간을 오늘의 상황으로부터 구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현대 문화의 앞길이 대해 짙어 가는 회의를 씻지 못한 채, 이미 50년 전 「발레리」는 이러한 말을 던진바 있다. 이러한 의문은 아직도 해답을 못 얻고, 그러한 본원적인 회의는 오히려 더 짙어져 가고 있을 뿐이다.
1972년의 문화상황을 사로잡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위기의식의 음영이라 할 수 있다. 더우기 참다운 가치창조의 구현체로서의 「하이블로」한 문화가 대중문화에 의해 밀려나고, 그 「트레거」(담부자)로서의 문화「엘리트」가 창조적 「에너지」를 상실했다는데서 위기감은 한층 더 짙어지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두개의 위기적 상황>
오늘의 인간은 일반적으로 두 개의 위기 상황 속에 놓여져 있다. 이것은 「노먼·메일러」의 지적이지만, 그 하나는 핵전쟁과 강제 수용소화 한 거대한 국가권력에 의한 『돌연한 죽음』의 위기요, 또 다른 하나는 모든 창조적·비판적 본능을 억압하는 획일주의에 의한 『완만한 죽음』의 위기이다.
이러한 상황은 「메일러」가 60년대 후반기의 문화 상황을 두고 한 말이었으나, 그러한 진단은 72년, 우리의 정신계를 전망할 때 오히려 한층 더 변화되고 있을 뿐 조금도 완화될 전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실로 오늘의 문화는 이와 같은 『도발적 복지사회』가 지니고 있는 일동의 위기, 그리고 이에 대한 허망에 가까운 반항의 몸부림 속에서 숨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의 문화가 지니고 있는 변조성·경화병 등 온갖 병리도 그 원류를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런데서 유래한 것임을 깨달아야하겠다.
문화는 한 사회가 창조적 긴장에 가득 차 있을 때에만 발전한다. 뒤집어 말하면, 창조적 긴장과 이에 따르는 창조적 「에너지」가 자유롭게 분출될 수 있는 토성에서만 문화는 발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제도와 의식, 세대와 세대, 체제와 반체제, 묵은 가치질서와 새 가치질서, 도전과 반응사이의 자유스러운 대결이 가능할 때에만 문화의 창조적 발전은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스런 대결의 터전은 날로 좁혀져 가고 만 있다. 그저 「마르쿠제」의 이른바 「억압적 관용」에의·순응만이 강요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미국을 포함한 온 세계에 걸친 일반적 상황이기도 하다.
문화란 본래 온상 속의 무풍지대 속에서는 결코 자라나지 못한다. 모진 바람을 받고, 여러 가지 병균의 오염에조차 노출돼 있을 때, 비로소 문화의 나무는 강인해지고 크게 자란다. 온상 속에서 인공 열을 받아가며 곱게 자란 야들야들한 문화는 사소한 충격이나 마찰만 받아도 쉽사리 꺾이거나 풀 죽어 버리기 마련이다.
자유와 관용이란 표면상 매우 유사한 것 같이 보이면서도, 특히 문화의 성장이라는 「로직」에서는 그 내포하는 의미 내용이 전혀 달라지는 것도 바로 이런데 까닭이 있다. 그러나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지금 이런 본원적인 자전의 모습은 사라져가고, 그 대신 억압적 관용이 판을 치고있는 상황이 조성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마비된 문화와 문화「엘리트」는 관용의 테두리 안에서 차차 창조의 「에너지」를 상실해 가며 있는 것이다.

<대중의 문화가치 참여>
이리하여 오늘의 문화는 우선 가치기준의 다극화를 가져 왔고, 물질과 「힘」을 유일한 가치척도로 삼게 하는 한편, 감각과 소비와 향악을 바탕으로 하는 「레저」문화를 키워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향은 오늘 우리의 정신적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에도 날로 심해져 갈 수밖에 없는 우려를 낳게 하고있다. 대량 속에서 오히려 풍요감을 느끼지 못하는 아쉬움, 체제로부터의 소외감, 『철저한 죽음』에 대한 반역에서 나은 미국 젊은 세대들의 환각제적 문화는 그런 뜻에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고 판단하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문화가 풀어야할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미 문화창조의 기능을 잃어버린 문화 「엘리트」등에게 그를 본래의 창조적「에너지」를 소생시켜 주느냐 하는 것과, 또 어떻게 하면 그들이 창조해 내는 문화가치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대중을 획득, 그들의 힘을 확대시킬 수 있느냐 하는 과제이다. 앞으로의 문화「엘리트」가 힘들여야할 가장 벅차고 큰 과제는 바로 이런데 있다 하겠다.
대다수의 현대인은 어지럽다 할만큼 급격하게 달음박질치는 문명의「템포」를 좀처럼 따라갈 수 없다. 모든 것이 뒤바뀌는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방향감각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풍부한 물량과 이에 따르는 욕망의 홍수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고 뚜렷한 주체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만이 문화「엘리트」들의 존재이유라는 것을 우리는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의 인간들은 본래의 자아를 망각한 체 인간에의 무관심으로부터 자기소외에 빠져들고, 급기야는 스스로 반 자유에의 길을 더듬고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그리고 후퇴해가고 있는 것은 바로 인간 정신일 따름이라는 사실인식 또한 중요하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문화는 이런 자세를 보여왔다. 그것이 손쉽게 회복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의 징조도 아직은 미미하다.
그러나 앞으로의 문화가 그 본래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풀어 나가려는 결단이 부 가결한 전제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오늘의 세계의 전반적 문화상황을 개관하면서, 한국문화 「엘리트」들의 본질적 각성 문제를 1972년의 전망에서 새삼 제기한 취지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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