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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고구려인의 웅대한 비전과 업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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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이영관
순천향대 글로벌경영대학 교수

고구려는 700여 년 동안 동아시아의 북방지역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힘이 강할 때는 중국대륙으로 진출해 북경 너머까지 영토를 확장했었다. 고구려가 기나긴 역사를 써 내려가는 동안 중국대륙에서는 서한에서부터 당나라까지 수십여 개의 국가들이 생겨났다 없어지는 혼돈된 상태가 지속됐다. 아쉽게도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됐지만 고구려인들이 보여준 웅대한 비전과 업적들을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뜨거워진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와 모친인 유화의 아들로서 서기 전 58년에 태어났으며 성은 고씨고, 이름은 주몽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서기 전 37년 즉위해 18년 동안 나라의 기강을 공고히 하는데 주력했다. 그는 즉위 후 ‘구려’라는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대대적인 영토 확장에 나섰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여러 민족들이 서로 다투는 형국이 전개되고 있었다. 중국의 한족들은 동아시아의 북쪽사람들을 동이족이라 불렀다. 동이의 이(夷)자는 큰 대(大)와 활 궁(弓)이 결합된 글자로 동이족이란 동쪽에 있는 큰 활을 잘 다루는 민족이란 의미로 해석된다. 고구려 벽화에는 말 달리며 활을 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의 무사들은 말 달리며 큰 활을 활용해 적을 제압하는데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군사무기들이 고도로 발달하지 못했던 2000여 년 전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달려오는 적군을 향해 말 타고 이동하면서 쏘아대는 화살들은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삼국지를 읽어보면 위, 촉, 오 삼국과 고구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고 있다. 이는 삼국지의 기술방식이 다분히 중국 중심적인 사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중국 대륙의 나라들이 자웅을 겨루는 가운데 대국이었던 고구려와의 복잡한 외교전과 무력충돌은 빈번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국력은 점점 강해져 391년 즉위한 광개토대왕 때에는 명실상부하게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불가피하게 백제와 신라의 영토는 크게 위축돼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바로 이때가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판단된다.

한반도의 역학관계와 산이 많은 지형적 특수성, 왜의 간섭에 따른 복잡한 외교관계를 고려하면서도 고구려는 대륙의 강자였던 후연을 봉쇄하며 한반도 통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었다. 비록 고구려는 드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방에서 고구려를 침략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여건 속에 놓여있었다.

적군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데 뒤편에서 적군이나 적의 연합군이 아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하게 되면 아군의 군사력이 압도적일지라도 승리하기가 쉽지 않는 것이 병법의 보편적인 원리다.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여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특수성을 고려할 때, 고구려는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 못지않게 백제와 신라를 통일해 국력이 분산되는 지정학적인 특수성을 극복했어야 했다.

이영관 순천향대 글로벌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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