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번득이다'와 '번뜩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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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1988년 한 엔지니어가 딸에게 줄 장난감 개구리를 만들던 중이었다. 글루건 을 쏘아가며 모양을 잡아가던 그에게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3차원의 물질을 복사해내면 어떨까?’ 그는 이듬해 3차원(3D) 프린팅 기술에 대해 특허를 내고 회사를 설립했다. 세계 최대 3D프린터 회사 스트라타시스를 창업한 스콧 크럼프 회장의 이야기다.”

 지금 3D프린터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글에는 문제가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현행 규범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뭘까. ‘번득이는’이다. 무슨 소리냐고? 생각 따위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는 ‘번득이다’가 아니라 ‘번뜩이다’이기 때문이다.

 ‘번득이다’는 ‘번득이는 맹수의 눈빛’ “금목걸이가 햇빛에 번득인다”처럼 쓰인다. 이 ‘번득이다’보다 조금 센 느낌을 주는 말이 ‘번뜩이다’이다. ‘번뜩이는 재치’ “기지가 번뜩였다”처럼 사용된다. 윗글에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했으니 ‘번득이는’이 아니라 ‘번뜩이는’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번득이다’에는 ‘물체 따위에 반사된 큰 빛이 잠깐씩 나타나다. 또는 그렇게 되게 하다’는 뜻밖에 없다. 다시 말해 ‘번득이는 아이디어’는 현행 규범에서는 틀린 어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번득’과 ‘번뜩’은 여린말과 센말의 관계다. 접미사 ‘-이다’가 붙어 ‘번득이다’와 ‘번뜩이다’가 됐다. 그런데 유독 생각 따위가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것을 이르는 말로 ‘번득이다’는 안 되고 ‘번뜩이다’만 인정한다. ‘물체 따위에 반사된 큰 빛이 잠깐씩 나타나는 것’에서 ‘생각 따위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도저히 유추해낼 수 없을까. 더구나 이런 사실을 외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합리적일까.

 큰 빛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이르는 단어로 ‘번적이다’가 있다. 이보다 센말이 ‘번쩍이다’이다. ‘번득이다’ ‘번뜩이다’의 관계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번득이다’에도 생각과 관련된 뜻풀이를 더해주는 것이 사람들을 편리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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