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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제자는 필자>|<제21화>미·소 공동 위원회 (14)|문제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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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좌우 합작의 붕괴>
공산당의 성명은 ①민족 통일 본부 같은 것은 통일 공작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②입법 기관에 참여하기 위한 합작자도 합작을 파괴하는 자다 ③합작의 목표는 통일 민주 정권 건설에 있다 ④지금 정세로는 공위 속개 투쟁 공작으로 나가야할 것이다 ⑤원칙적 통일 공작을 방해하는 자의 배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 공산당이 우익 진영과의 합작으로 통일 정부 수립을 희망하지 않는 것을 밝힌 것이었다. 말로는 합작을 찬동했지만 행동으로는 합작을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러는 가운데 22일 덕수궁에서 합작 예비 회담이 열렸다.
우익 측에서는 김규식 등 4명, 좌익 측에서는 여운형 등 5명이 참석하여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 회의를 갖도록 결정했는데 두번째 회의가 열리기 전날인 7월25일에 좌익인 소위 남조선 민주주의 민족 전선에서 좌우 합작 5대 원칙이란 것을 내놓았다.
「민전」의 5대 원칙이란 것은 도저히 우익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대개 ①3상 회의를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공위 속개 운동을 전개하여 남북 조선의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에 매진하되 북조선 민주주의 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전국적 통일을 기한다 ②토지 개혁 (무상 몰수·무상 분배) 중요 산업 국유화 민주주의 노동 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제과업 완수 ③친일파 민족 반역자 친 「파쇼」 반동 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로」를 박멸하여 검거 투옥된 애국 투사 (공산당원)의 즉시 석방 ④군정을 즉시 인민 위원회에 넘길 것 ⑤군정 고문 기관 혹은 입법 정권 창설에 반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5개 원칙이 발표되는 바람에 26일에 열린 두번째의 예비 회담은 아무 진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좌익 대표들은 채 나오지도 않았다. 이렇게 되자 우익 측도 29일에 합작 8원칙을 내놓아 대항했다. 김규식의 비서이던 송남헌이 이를 전달했다.
우익 측의 주장은 『①남·북을 통한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에 노력할 것 ②공위 재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서의 발표 ③신탁 문제는 임시 정부 수립 후 정부가 공위의 자주 독립 정신에 의해 해결할 것 ④임정 수립 후 6개월 이내에 보통 선거로 전국 국민 대표자 회의를 열 것 ⑤보통 선거를 완전히 실시하기 위해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 투표의 자유를 보장할 것 ⑥제도 및 법령은 균등 사회 건설을 목표로 국민 대표 회의에서의 정할 것 ⑦친일파 민족 반역자 등을 응징하는 특별 법정을 구성할 것 ⑧국민 대표 회의 성립 3개월 후의 정부 수립』이었다.
이 8원칙은 좌익 측이 받아들일 리가 없는 것이었다. 합작이 논의되는 동안 우익의 한민당은 주의 깊게 관망했고 한독당은 반발하고 있었다.
「버치」등이 김규식을 밀고 있는 동안 미군 정청의 일부에서는 이승만과 이범석을 미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뚜렷하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에 차차 남한에서의 극좌파가 시들어 갔다. 그것은 미국에서 평양에 미국 영사관을 설치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소련이 불응한데서 서울에 있는 소련 영사관을 철수하도록 요구, 6월24일에 철수 결정이 내렸다가 7월1일 영사관이 철수한 것과 공산당의 불법화로 차차 극좌파의 발판이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극좌파의 기운이 약화하자 5원칙과 8원칙의 대립으로 정돈됐던 합작 기운이 다시 일어나 10월7일에 합작 회담이 또 열리게 되었고 여기서 5원칙과 8원칙을 절충, 「합작 7원칙」이 이루어졌다.
김규식·여운형의 명의로 된 7원칙은 ①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합작으로 임정의 수립 ②공위 속개 공동 성명의 발표 ③몰수 유조 건물 수 체감 매상으로 거둬들인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하는 토지 개혁, 주요 산업의 국유화, 지방 자치제의 확립 ④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처리할 조례의 작성 ⑤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 하에 검거된 정치범의 석방 및 「테러」의 중지 ⑥입법 기관의 기능, 구성 운영 등의 대안 작성 ⑦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 보장이었다.
이 결과 군정청은 합작이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고 12월10일 입법의원 찬성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45명의 관선 의원을 발표했다. 합작 의원은 김규식 여운형 원세훈 최동오 안재홍 김봉준이었고 우익 정당 대표는 김약수 장자일 고창일 이순탁 조완구 엄항섭 엄용우 김호 김돈 유진희 오화영 정이형 등이고 좌익 정당은 장건상 염정권 신기언 김학배 이창혁 강순 박건웅 황진남 홍명희 여운홍 윤기섭 이응진 등이었다. 이밖에 신익희 조소암 김도연 등 43명의 민선 의원이 선출됐다.
그러나 좌우 합작은 이것이 끝장이었다. 한독당·독족·인민당·한민당 등과 종교 단체·비상국민회의 등 여러 단체에서 합작 7원칙을 불신·반대하는 성명전이 크게 벌어져 합작의 산파역이던 원세훈 (한민당)이 탈당하게 되고, 민족 진영의 중진 정당인 한민당이 동요가 빚어졌다. 좌익 계열인 민전·조선 공산당·인민당 등과 피나는 싸움을 통해 공산당 세력을 눌러온 한민당이 7원칙의 예후로 분열된 것은 우리의 비극이자 교훈이었다. 10월 폭동에 겹쳐서 미군 정청도 국제 정세의 변화로 단독 정부 수립에 기울고 있었다. 이것으로 합작이 깨진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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