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뿌리 깊은 타자 의식 문화 … 한·중·일서만 별난 현상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그래픽 임소영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1. 지난달 15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 LA 다저스 선발투수 류현진이 7이닝 3피안타·무실점의 호투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꺾었다.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에서 한국인으로는 첫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발견됐다. 포털 검색어 순위에 ‘류현진 현지 반응, 해외 반응’이 상위권에 오르더니 ‘가생이닷컴’이란 사이트가 동시 접속자 제한(2만 명)을 넘어 일시적으로 멈춰섰다. 이 사이트는 해외 네티즌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번역 소개하는 곳이다. 한국인 스포츠 스타의 활약이 해외 반응 사이트의 접속 폭주로 이어진 셈이다.

 #2. 지난 4월 12일 0시, 노래 ‘강남스타일’로 세계적 히트를 기록한 가수 싸이의 신곡 ‘젠틀맨’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공개됐다. ‘유튜브 최다 조회’로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가수의 신곡이라 주목을 받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국내 포털사이트 검색어에서 가장 상위를 차지한 것은 ‘젠틀맨 해외 반응’이었다. 젠틀맨 뮤직비디오나 춤, 가사 등에 대한 관심을 모두 제친 것은 ‘남들의 시선’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자긍심의 표출인가, 민족주의의 그림자인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유독 뜨거운 ‘해외 반응’에 대한 관심과 집착 얘기다. 스포츠·연예 분야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정치·경제·문화를 막론하고 어떤 이슈가 발생하면 해외 반응을 따져보려는 수요가 폭증한다. 이에 따라 한국발 이슈에 대한 해외 네티즌들의 댓글들을 전문적으로 번역·소개하는 사이트들도 생겨나고 있다.
 
분야별 이슈 정리 … 언론사 홈피 뺨쳐
류현진·박지성·김연아 등 해외에서 활약하는 국내 스포츠 스타의 경기나 관련 소식이 있을 때면 빠짐없이 포털의 검색어 상단에 등장하는 게 ‘해외 반응’이다. 2일 오후 3시를 기준으로 주요 포털사이트에 ‘해외 반응’ 키워드를 넣어보면, 관련 블로그 게시물만 네이버 19만9916건, 다음 26만1000여 건이나 된다.

 네티즌들의 관심이 커지자 해외 반응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사이트도 여럿 있다. 국내에는 ‘가생이닷컴’과 ‘개소문 닷컴’이 대표적이다. 이들 외에도 한류 스타 소식을 전하면서 해외 반응 코너를 함께 운영하는 사이트는 10여 개나 더 있다.

 연예·스포츠만 다루는 게 아니다. 대표적인 해외 반응 사이트 가생이닷컴은 언론사 홈페이지를 방불케 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별로 이슈가 정리돼 있고, 각각에 대한 해외 네티즌의 댓글이 실시간으로 번역돼 오른다. 정치 분야에는 국산 경전투기 FA-50의 필리핀 수출과 관련해 필리핀 현지의 반응을 다루는 게시물의 조회 수가 3만여 건이나 됐다. 필리핀 전투기 수출에 대한 중국의 ‘자제 요청’ 기사를 둘러싼 댓글, 일본 네티즌들의 반응까지 소개된다. 현재 가생이닷컴은 회원 수 8만 명, 하루 접속자 수가 평균 10만 명을 웃돈다.

 가생이닷컴 운영자 이상호(42)씨는 “자체적으로 전문 번역 기자들을 10여 명 고용했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이들은 영어, 중국어, 일어 등 해당국 언어에 능통하고 주요 이슈에 대한 배경 지식도 갖췄다. 단순 직역이 아니라 맥락에 맞는 의역을 하는 데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스스로 확인 받고 싶은 정체성을 반영”

해외 반응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사이트는 미국·유럽 등 서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한국·중국·일본에서 유독 인기다.

 중국에는 해외 반응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룽텅(龍?·ltaaa.com)’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룽텅의 특징은 반응을 따오는 해외의 ‘범위’가 무척 넓다는 점이다. 한국·일본·미국뿐 아니라 인도·터키·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 등 다양한 국가의 중국 관련 소식과 그 반응을 번역해 올린다. 중국 최대의 검색 포털 ‘바이두(白度·baidu.com)’에서도 해외 반응을 소개하는 글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선 해외반응만 따로 취급하는 사이트가 없다. 하지만 극우적 게시물이 많이 오르는 커뮤니티 사이트 ‘니찬네루(2ch.net)’에는 특정 이슈가 있을 때 한국·중국 네티즌들의 관련 반응이 단골로 소개된다. 최대 포털 ‘야후 재팬’도 눈에 띈다. 일본 언론사들은 자체 홈페이지에 독자들의 댓글을 허용하지 않는 곳이 많다. 익명으로 댓글을 달 수 있는 야후 재팬 사이트에는 주요 이슈가 터졌을 때 해외 반응을 번역·소개하는 글이 쏟아진다.

 한국에선 2005년 9월 문을 연 ‘개소문닷컴’이 원조다. 특이한 작명에 대해, 처음 사이트를 만든 IT칼럼니스트 안진홍씨는 “소문닷컴으로 하려고 했으나, 도메인 이름을 선점당해 당시 접두사로 유행하던 ‘개’자를 덧붙였다”고 설명했다. 가생이닷컴은 2010년 등장했다. 운영자 이상호씨는 “가생이는 ‘가장자리’의 사투리다. 한국의 위치가 미·일 등 강대국의 가장자리에 있다는 인식을 갖고 이름을 붙였다.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들어가자는 의미도 담았다”고 말했다.

 유독 한·중·일 세 나라에 해외 반응 사이트가 많은 건 어째서일까.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동아시아 국가가 자생적 모델로 발전하지 못한 게 근본 이유일 것이다. 모두 유럽과 미국을 따라잡으며 성장해 왔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평가할 때도 서구의 시선을 의식하는 게 내면화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신과 의사인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교수는 ‘거울 단계(mirror stage) 이론’을 매개로 설명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이 제안한 이 개념은 원래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기와의 동일시를 통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아가 ‘개인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사회적 참조(social referencing)를 통해 평가받으려는 욕구’를 설명할 때도 쓰인다. 윤 교수는 “결국은 스스로를 확인받고 싶다는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된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와 동일시하고, 이들의 해외 반응에 열광하는 현상의 심리적 바탕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국가 간 갈등 부채질 부작용도 잦아
해외 반응에 유달리 집착하는 것은 집단주의 또는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윤병남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동아시아 세 나라가 해외 반응에 민감한 것이 민족주의 정서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윤 교수는 “한국과 일본은 단일민족 의식이 강하다. 중국도 단일민족은 아니지만 국가를 중심으로 같은 공동체임을 유난히 강조하는 나라다. 해외 반응에 민감한 것도 민족주의 정서가 정보기술과 만나며 나타난 복합적 현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해외 반응 사이트는 한·중·일 세 나라 네티즌 사이의 감정적 갈등을 부채질하는 경우가 많다. 각국의 신뢰할 만한 언론사가 아니라 개인 블로그 등에서 뉴스를 가져와 비난을 퍼붓고, 이런 반응을 다시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뒤 욕을 하는 식의 악순환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제대로 된 민족주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의견도 있다. 윤인진 고려대 교수는 “민족주의란 건 외세에 배타적인 것 아닌가. 남들이 뭐라 평가하건 자신만의 것을 선호하는 게 민족주의의 모습이다. 해외 반응 사이트를 보면 민족주의적 주장이 난무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볼 때 남의 눈치를 보고, 남을 질투하는 등 사대주의에 가까운 모습이 더 많이 관찰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 있다는 얘기다. 손태규 단국대 언론학과 교수는 “미국에서 한국계 운동선수에게 ‘that player is great’라고 표현하면 그냥 꽤 잘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한국에 오면 ‘위대한’ 선수가 된다. 과장된 해석인데, 이게 단지 영어를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런 식의 과장되고 자극적인 해석에 언론도, 네티즌도 익숙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는 “해외 반응에 민감한 것도, 이걸 지나치게 과장해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병리적 현상이다. 우리 스스로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라고 말했다.

이승녕 기자 ·정재홍 인턴기자 francis@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

관련기사
▶ 현지인들, 이해 못하는 교포사회 극단적 문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