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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도'의 재발견 … 박근혜정부서 충청 파워도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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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009년 타계한 김용래 전 충청향우회 총재는 생전에 ‘엄청도 전도사’로 불렸다. 엄청도. ‘엄청난 충청도’란 뜻이다. 지역 출신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는 어김없이 충청인의 단결을 강조하는 ‘엄청도’론을 설파했다고 한다.

 총무처 장관·서울시장 등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자주 이런 불만을 토로했다.

 “충청 주민과 충청 출향 인사가 전 국민의 25%나 되는데 왜 정부 고위직 인사에서는 충청인을 찾아보기 힘든가.”

 한국 정치권의 이른바 ‘충청권 홀대론’에 대한 불만이다.

  실제로 해방 이후 최근까지 충청권은 중요하긴 하지만 주체는 아닌, 한국 정치의 ‘변수’ 정도로 인식됐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이 지역 출신 인사는 제4대 윤보선 대통령(충남 아산) 한 명뿐이다. 윤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1960년 8월~1962년 3월)은 2년도 채 안 됐다.

의석 수 호남에 비해 5석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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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요즘 들어 충청권이 정말 ‘엄청도’가 될 것 같은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올 들어 충청권 인구가 호남권을 앞지르면서다. 안전행정부 주민등록인구 통계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충청권 인구는 526만3233명으로 호남권(525만329명)보다 1만2904명 많았다. 호남권은 인구가 제자리걸음인데 충청권은 매달 3000명씩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2017년 19대 대선에서는 두 지역 인구 격차가 31만 명 이상 벌어질 거라는 전망이다. 이제는 영호남 구도가 아니라 영·충·호 구도라는 얘기도 공공연히 나온다.

 한글날인 10월 9일. 충북 음성의 한 골프장에서 새누리당 충청권 국회의원들이 단합을 겸한 골프 회동을 가졌다. 이 지역 출신 의원 14명이 참석했다. “근래 새누리당이 이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의석을 보유한 일도 없거니와 이렇게 많이 모이기도 처음”이라고 충남지사를 지낸 이완구 의원이 말했다. 의원들의 관심은 충청권 국회의원 선거구 증설 문제로 모아졌다고 한다. 인구 수나 유권자 규모에서 호남을 앞질렀지만 국회의원 의석 수는 충청이 25석(세종 1, 대전 6, 충남 10, 충북 8)이다. 호남 30석(광주 8, 전남 11, 전북 11)에 비해 5석 적다.

 새누리당 이인제 의원은 “인구 대비 의석 수로 따져보면 호남뿐만 아니라 영남도 충청보다 많은 편”이라며 “이는 영호남이 낡은 정치를 일삼아 자기네끼리 나눠 먹은 결과”라고 말했다.

 민주당 국회의원들도 이 같은 불균형은 2016년 20대 총선 전에 바로잡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병석 국회부의장, 양승조·박수현·이상민 의원 등 충청권의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9월 30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국회에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선거구 획정을 논의하자고 새누리당에 제의했다.

 이런 움직임은 한국 정치의 주변부에 머물던 충청권이 박근혜정부 들어 한국 정치의 중심부로 이동하는 흐름의 하나다.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가 10월 30일 경기 화성 갑 보궐선거를 통해 원내 재진입에 성공한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그는 충남 천안 출신이다. 서 전 대표의 국회 입성은 여권 권력지형에 미묘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본인은 언급을 자제하고 있지만 벌써부터 당내엔 서 전 대표가 내년쯤 당권을 차지하는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서 전 대표 말고도 이미 새누리당과 국회, 정부엔 충청권 인사들이 약진해 있는 상황이다.

 국회의장 자리는 그간 힘 있는 지역 출신들이 독식하곤 했다. 18대 국회에선 김형오·박희태 의장 등 PK(부산·경남) 출신끼리 의장석 바통을 이어받았다. 17대(김원기·임채정)는 모두 호남 출신, 16대는 TK(대구·경북) 출신인 이만섭, PK출신 박관용 의장을 거쳤다. 15대(김수한·박준규)는 모두 TK 출신이었다.

 그러나 19대 국회는 국회의장의 출신지역이 달라졌다. 지난 9월 25일 서울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엔 충청권 유력 인사들의 모임인 ‘백소회’ 회원 수십 명이 모였다.

 백소회는 ‘백제의 미소’ ‘100번 웃자’라는 뜻이다. 충청 출신 전·현직 장·차관, 국회의원, 법조인, 금융인 등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날의 국회의장 공관 모임은 백소회가 설립된 1992년 12월 이후 21년 만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창희 국회의장이 헌정사상 최초의 충청권 출신 국회의장이기 때문이다. 강창희 의장뿐만 아니라 민주당 몫 부의장(박병석·대전 서갑), 국회 사무총장(정진석·충남 공주 출신)이 모두 충청 출신이다.

 집권 여당을 들여다봐도 충청 출신의 정치적 존재감이 커져 있는 상태다. 박 대통령과 오랜 교분을 다져온 김용환 고문(충남 보령 출신), 충북지사를 지낸 정우택 최고위원, 충남지사를 지낸 이완구 의원, 이인제 의원 등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서 전 대표까지 원내로 ‘컴백’했기 때문이다.

 박근혜정부의 지방자치 정책 얼개도 충청 라인에서 짜게 된다. 새 정부 들어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에 심대평 전 충남지사(충남 공주),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에 이원종 전 충북지사(충북 제천)가 발탁됐다.

 지난 5월 15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충청권 의원들과 정부 4개 부처 장관이 참석한 조찬간담회는 달라진 충청권의 위상을 보여줬다. 이날 모임엔 정부에서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유진룡 문화체육부 장관,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이 참석했다. 새누리당에선 정우택 최고위원을 포함해 이인제·이완구·홍문표·이에리사 의원 등 충청 출신 의원 17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정 최고위원은 “충청의원들이 정부부처 장관을 한데 불러 지역 현안을 집중적으로 다루기는 아마 1998년 공동여당이던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 이래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부터 충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대구에서 태어나고, 국회의원 지역구도 대구 달성인 박 대통령에게 충청은 어머니의 고향이다. 충북 옥천엔 박 대통령의 어머니인 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다. 충청 출신의 김근식 새누리당 수석 부대변인은 “충청은 박 대통령에게 제 2의 고향, 아니 ‘1.5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새누리당이 충청권 1당이지만 한두 해 전만 해도 사정이 달랐다.

 “냅둬유, 누가 되겠지유~.” 선거 때마다 충청권 유권자들은 판세를 묻는 말에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누가 당선되든지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며 누가 되든 그저 조용히, 편하게 살게만 해줄 수 있으면 족하다는 충청권의 관조적 자세를 대변하는 표현이다.

 그래서인지 충청권 1당은 지난 10년간 총선만 지나면 바뀌었다. 2004년 총선 땐 열린우리당이 지역을 석권하다시피 했다. 새누리당 전신 한나라당은 1석(충남 홍성-예산)을 얻는 데 만족해야 했다. 2008년 총선에서는 자유선진당과 통합민주당이 충청권을 양분했다. 역시 한나라당은 충청권 25석 중 1석(충북 제천-단양)을 건진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2012년 총선 땐 새누리당이 1당으로 올라섰다.

"내 고장 출신 대권주자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지금 충청인들은 유력한 자기 고장 출신 대선 주자의 출현을 어느 지역민보다 더욱 갈망한다고 한다. 그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같은 이 고장 출신들이 ‘대망론’을 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갈망이 더 커진 측면도 있다.

 2009년 11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세종시 수정안’을 제시하면서 촉발된 세종시 논란 국면에서 충청권 여론은 ‘세종시 원안’의 고수였다. 세종시 원안은 ‘행정중심 복합도시’다. 대통령은 ‘교육과학중심 경제도시’로 가자고 했으나 충청민들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당시 충청권 일각에서는 이를 ‘왕도(王都)의 꿈’으로 불렀다. 충청권이 세종시 원안에 그렇게 매달린 건 비록 인구의 열세로 대통령은 배출하지 못해도 수도만은 충청권으로 가져와야겠다는 의식이 근저에 흘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당이든 충청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후보가 나타난다면 영남 또는 호남과의 연대를 통해 정권을 창출할 수도 있다는 게 정우택 새누리당 최고위원의 주장이다.

 민주당 입장에선 충청 출신의 대선주자를 옹립하면 ‘제2의 DJP(김대중+김종필) 연대’를 성사시키게 된다. 1997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손잡고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당시는 충청이 호남을 밀어줬다면 이번에는 호남이 충청을 밀어주는 모양새가 되면서 1997년 당시에 진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논리로 안희정 충남지사 등이 벌써 차기 주자군으로 분류되고 있다.

  새누리당 내 충청 출신 인사들도 17, 18대 대선에서 영남 후보를 밀어줬으니 다음에는 영남이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속내를 내비치고 있다. 정우택 최고위원은 “아마도 다음 대선에서 새누리당이 영남 후보를 내면 호남과 중부권의 강한 반감을 살 것”이라고 예상했다.

 충북 음성 출신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여권 일각에서 관심을 쏟는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치 않다. 문화일보가 지난달 10월28~29일 실시한 차기 대선후보 호감도 조사에서 반 총장은 26.8%로 1위를 기록했다. 안철수 무소속 의원(16.9%), 문재인 민주당 의원(11.3%), 박원순 서울시장(7.3%), 김문수 경기지사(4.2%),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3.9%) ,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3.5%),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2.9%), 김황식 전 국무총리(0.6%)를 모두 따돌렸다.

 유엔 사무총장 임기가 끝나는 시점(2016년 12월)이 다음 대선(2017년 12월) 전이라 마음만 먹으면 변신이 가능하다. 물론 ‘반기문 대망론’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는 이도 많다. 평생을 외교 공무원으로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커온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할지는 미지수다. 새누리당 친박계의 한 인사는 “반 총장은 과거 대선 출마설이 나돌았던 고건 전 총리보다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내다봤다.

 기존 충청권 정치인들의 암중모색도 활발하다. 새누리당 이인제 의원은 “국민적 여망이나 시대적 변화에 따르자면 지금과 같은 영호남 지역패권 구도로 가서는 안 된다”면서 “패권주의로부터 자유롭고 정치적 기득권을 누리지 않는 충청이 후진적 정치 구도를 깨는 데 촉매제 기능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성현 월간중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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