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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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일본서 걸러오는 국제전화를 받아본 사람은 알고 있다. 교환양은 으레 일본말로『모시, 모시』(여보세요)한다. 이쪽의 응대가 시원치 않으면 그 제서야 영어가 등장한다.
일본어나 영어나 외국어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중 한쪽은 착잡한 뉘앙스를 갖고 있는 면에서 구별된다. 실로 모처럼 만에 일본인을 만났던 한 화대가 퍽 무량한 감회를 억누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어디 혀가 말을 잘 들어야지!』이 소감을 함께 듣는 20대의 얼굴에는 어딘지 미묘하고 안쓰러운 표정이 지나간다.
일본은 근세에 서구문명의 창 구실을 스스로 해온 것이 사실이다. 모든 학문에서 그들은 용어의 개념을 그들 나름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일본의 유수한 학자들은 평생을 바쳐 가며 그 서구의 용어 하나를 가지고 동양화, 아니 일본화를 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언어마저 빼앗기고 오랜 식민치하에 시달리던 우리와는 처지가 다르다. 우리는 쓰디쓴 과거를 회 오하며 새삼 일본어의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군국주의 재 대두 논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현실은 더구나 우리의 처지를 소연하게 만든다.
『일본어를 안다』는 것과『일본어를 통한 이해와 사고를 기른다』는 것은 차갑게 분별되어야한다. 영국의 역사학자「아널드·토인비」박사는 스스로 11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깊이 감동하고, 그 은밀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희랍어나 라틴어로 시를 씁니다.』토인비는 분명 모국어인 영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두고 희랍 정신의 노예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감동할 뿐이다. 만일 한국의 어느 학자가 일본어를 놓고 그렇게 말한다면 누가 감동할지 궁금하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일본의 언어와 일본적인 사고를 물과 기름처럼 갈라놓을 수 없는데 바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일본어 붐 그것이 아니라 일본 정신에의 예속 감 그것이다. 언어에의 예속 감이 우리의 생활과 생각과 이성을 어떻게 흔들어 주는지는 오래지 않은 역사의 몇 페이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간의 풍화작용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엄연한 역사의 교훈이다.
실로 우리의 앞선 세대가 새로운 세대에 남겨줄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일본어에의 향수가 아니라, 우리말의 아름다운 시와, 우리말을 통한 사상과, 우리말을 통한 이해력과, 우리말을 통한 주체의식일 것이다. 수화기 속에서『모시, 모시』할 때 우리의 새 세대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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