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5)법관에게 보내는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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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달 전에, 그렇습니다. 꼭 한달 전에, 당신들은 쌓이고 쌓였던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어 온 누리에 외쳤습니다. 원래 말이 없어야 하는 당신들이, 뒷사람들에게 입 없는 고고의 성을 물려주고자, 스스로 파계승이 되기를 주저치 않았던 겁니다.
시민들은 놀랐습니다. 두 손을 모아 쥐고 귀기울였습니다. 짓궂은 사람들의 치기 어린 방해전파에도 아랑곳없이, 당신들의 외짐은 너무도 절실하게 귓전을 두드렸습니다. 뿌연 연막 속에서도, 시민들은 당신들의 분 루 속에서, 당신들의 사명감과 좌절감을, 당신들의 번뇌를, 참뜻을 남김없이 읽었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분노하고, 함께 떨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자칫하면 나라의 기둥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질 것 같은 두려움마저 감돌았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의 외침에 대한, 적서도 드러난 메아리는 너무도 미미하고, 모욕적이기조차 하였습니다. 당신들의 분노는 더욱 격해졌고, 급기야는 허탈과 실의만 남는 것 같기조차 하였습니다. 시민들은 안타 까왔습니다. 그리고 텅 비었을지도 모를 법정으로 염려스런 눈길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분노와 실의를 되씹으면서도, 당신들은 단 하루도, 단 한순간도 억울한 자, 약한 자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참으로, 의연하고 장하였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떠날 수 없음을 당신들의 약점이라고 까지 말하였습니다만, 당치도 않은 소리, 오히려 이것이 고고 해야할 당신들의 자랑이요, 참된 면목이었습니다. 억울한 자와 약한 자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 이상, 당신들은 떠날 수가 없고, 당신들의 눈길은 안으로 돌려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비장하게도 당신들은 그러하였습니다.
열었던 입을 굳게 다물고, 고고한 철벽같은 마음의 성을 다시 쌓아 그들을 끝까지 돌보고 지키기로 한 겁니다.
보장과 수호는 방패의 양면이긴 합니다만, 눈물을 삼키며 결연히 후자를 택한 당신들 이 었습니다. 다시금 굳게 닫힌, 그러나 떨고 있는 당신들의 입술에서 드높이 승화된 새로운 투지를 느끼면서 시민들은 갈채와 바람을 함께 보냅니다. 당신들은 결코 외롭지 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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