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북의 혈육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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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할아버지에게>(전 고대총장 현상윤씨)
할아버지, 저 재현입니다. 할아버지라는 아늑하고 따뜻한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하고 벌써 청년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끌려가신 뒤 지금까지 겪으신(저는 할아버지께서 아직도 살아 계시리라 믿고있습니다. 고난의 21년이 저에게는 성장의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군요. 그 당시 겨우 두 살이던 저로서는 할아버지의 기억은 제나름의 상상 속에 살아있고 또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두운 하늘밑의 어느 험난한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의지의 노인의 모습입니다. 사진으로만 본 가느다란 테의 안경을 끼신 이념에 차고 또한 인자한 그 모습 말입니다. 남북가족 찾기라는 뜻밖의 소식이 전해진 12일은 마침 재천형의 결혼식날이었읍니다.
경기고·서울공대화공과를 거쳐 미국「미네소타」대학교에서 4년만에 공학박사가 되어서 돌아온 재천형(28)과 서울대학교전체수석으로 서울공대에 입학하여 지금은 미국 「프린스톤」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는 재민형(26)과 저의 이름은 모두 할아버지께서 하늘(천) 밑의 백성(민)이 어질어야(현) 된다고 지어 주신 것이 아닙니까. 할아버지께서 가신 이후 여동생이 둘이나 자라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전혀 얼굴을 상상조차 못하실 재희(18·이화여고3년)는 어렸을 때부터 익힌 「피아노」솜씨가 아까 와서 서울대음대를 지망하고있고 재란(16·성신여중3년)은 고교임시준비에 여념이 없읍니다.
할아버지의 방대한 원고 조선사상사의 대부분을 사변 중에 잃어버리고 그 일부인 조선유학사는 3판까지 출판되었고 그것으로 고대박사학위 제1호를 기록한 것을 알고 계신지요. 할아버지의 숱한 유고와 장서는 모두 고대도서관에 기증되어 후학을 위해 쓰여지고 있습니다. 할머님과 아버님이 모두 돌아가신 지금 우리 손자들은 이번에 재천형의 장인이 되신 이인기 선생(숙대총장)께서 약혼식 날 말씀하신 바와 같이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신 지사중의지사』이신 할아버지의 뒤를 만의 일이라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읍니다.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견디고 있읍니다만 계속 수를 누리셔서 우리들의 큰절을 받을 날이 오기를 기다리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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