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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 찾는 수사|사법 파동|검찰의 사건 백지화 선언에 따른 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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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극한 상황으로 치닫던 사법권과 검찰권의 대립은 1일 검찰이 말썽의 불씨가 된 이범렬 부장 판사 등 두명의 현직 판사에 대한 수뢰 사건을 일단 불기소 처분키로 결정함으로써 사건 백지화를 선언, 표면상으로는 사태 수습의 실마리를 내놓았다. 민복기 대법원장도 자신의 책임 아래 이 사태의 해결을 위해 대법원 행정 회의를 소집하는 등, 사법부와 검찰의 고위 당국자들간에는 명분 있는 화해와 사태 수습의 길이 모색되어 지고 있다. 그러나 「사법권의 독립」을 주장하고 나선 서울 민·형 고등 각 지방 법원 판사들의 입장은 그렇게 만만한 낙관론은 아니다.
신직수 법무장관이 『현직 판사에 대한 사건을 불기소처분 하겠다』고 발표한 뒤에도 판사들은 한결같이 『판사들이 일괄 사표를 낸 것은 단순히 한 동료 판사의 형사적 책임 여부를 두고 행동한 것이 아닌 만큼 이제 와서 검찰이 「불기소 처분 운운」한다 해서 판사들이 당초 주장한 「사법권 독립 요구」와는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또한 재야 법조 인사들도 판사들의 의견과 거의 같은 방향을 나타내고 있어, 사법부 파동은 신 법무장관이 대거 양보한 「불기소 처분 발표」에도 당분간 파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여진다.
사법부 파동이 일자 휴가에서 돌아온 민 대법원장은 원만한 사태 수습을 위해 박 대통령과 신직수 법무장관을 만나려 했으나 당시 검찰의 태도가 강경했으며 신법무가 국회에서의 대 정부 질의에서 한 답변으로 시간이 없고 청와대 방문이 『구원을 요청하는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어 적당한 시기를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직위의 서열과 오해』를 받지 않으려는 서로의 입장 때문에 대화의 기회가 없었던 두 사람에게 31일 밤 「타워·호텔」에서 열린 8대 국회 개원 자축 「리셉션」이 다리를 놓아주게 됐다.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된 민 대법원장과 신 법무는 자연스럽게 인사, 사태가 수습되어야한다는데 뜻을 같이하고 다음날인 1일 수습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 법무는 이날 청와대에 들어가 이 사건에 대한 진상을 상세히 보고하고 사태 수습을 위해 입건된 판사들을 불기소 처분할 것을 건의, 박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를 나온 신 법무는 법무 장관실에서 이봉성 검찰 총장과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검찰의 기본 방침을 다시 논의, 이 검찰 총장과 함께 대법원장 공관을 찾아 민 대법원장, 김병화 법원 행정 처장만의 양측 수뇌 회담이 진행됐다.
이 자리에 모인 법원·검찰의 수뇌진은 다 검찰 출신으로 민 대법원장이 법무장관 재직 시에 모두 상명 하복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회담 도중 웃음소리가 나는 시공 부드러운 분위기였다고 회담에 입회한 한 관계자가 전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고위층의 사태 수습 방향에도 사표를 낸 법관들과 재야 법조인들은 사태를 수습하려는 정부측의 태도는 검찰이 강경했던 자세를 누그러뜨렸을 뿐 근본적인 사태 해결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제시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유태흥 서울 형사지법 수석 부장 판사는 『판사 독직 사건에 한해서라면 이날의 제의를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사법부의 독립을 요구한 우리의 요청에는 아무런 답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라고 말했다.
목요상 판사는 『지금은 특정인에 대한 기소 또는 불기소로 그칠 문제가 아니다. 검찰이 더 이상 법원을 망신시키지 않는 것이 고맙다고나 할까. 이번 제의를 받아들이면 결국 우리의 부정을 캐지 말라는 요구와 다를 것이 없다.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한 검사들이 손꼽을 정도의 몇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도 검찰 자신이 훤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이들이 인책돼야지 검찰의 제의와 같은 미봉책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법관들의 공통적인 견해인 것으로 믿는다』고 당초의 주장에 변함이 없다는 듯 강경한 태세다.
『법관들이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든가 이 사건에 관련된 검사나 감독관을 인책해야 사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이세중 변호사는 『검찰이 제시한 미봉책만으로는 사태가 수습된다해도 해묵은 감정이 내면적으로 스며들어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채 앞으로도 제2, 제3의 사법 파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동환 변호사도 『판사가 일괄 사표를 냈을 때는 명분 있는 요구를 위해 심사 숙고해서 행동했을 것이므로 이제 와서 불기소 처분을 했다고 해서 누그러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이들은 이번 사건이 명실 상부한 사법권 독립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명제라는 것을 말했다.
일부 재야 법조인들은 법원·검찰의 수뇌 회담에서 판사들이 지적한 사법권 침해 사례에 대해서도 논의됐으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몇몇 검사의 자의에 의한 것이며 당사자들의 오해로 빚어진 것으로 판단, 앞으로는 이 같은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합의했으나 대외적으로 밝히지는 않기로 묵계 됐을 것으로도 해석하고 있다.
한 대법원 판사는 『법관들이 지적한 사법권 침해 사례는 사실이라는 전제 아래 대법원 판사 회의에서 사태 수습책이 논의돼야 하며 검찰과 법원의 수뇌 회담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다면 사법부 자체의 해결방안이 나온다해도 근본적인 수습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심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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