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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중년 예찬, 생식은 끝나도 섹스는 끝나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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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대다수 인간은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 싶을 때, 삶의 끝에 이르렀음을 발견한다. 생식 활동 종료 뒤 20년쯤 되는 활기찬 세월이 중년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중년의 발견
데이비드 베인브리지 지음
이은주 옮김, 청림출판
340쪽, 1만6000원

책 제목만 보면 중년의 가치를 예쁘게 포장하고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중년을 살 것인가, 친절하게 알려줄 것으로 기대하게 되는데 실제 읽어 보면 불친절하다.

 이 책은 중년, 즉 ‘40-60세 인간’에 관련된 과학지식을 동물학자의 관점에서 응시하고 있다. 아름다운 결말을 설정하고 필요한 정보만 뽑아서 자기 논거(論據)의 증거로 쓰고 있지 않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명확히 이야기 하고 있다. 아마 그 솔직함이 불친절하게 느껴진 듯하다.

 새벽 1시경, 책을 읽고 잠이 들었다. 그리곤 내 감성시스템의 꿈 작업(dream work)이 시작됐다. 꿈은 이성이 잠든 사이 내 뇌의 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감성시스템이, 숨겨진 내 욕망과 삶의 스트레스를 상징과 은유로 이미지화해 셀프 힐링을 하는 시간이다.

 꿈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고 때론 악몽으로 느껴지는 것은 감성시스템이 논리적 언어 체계를 쓰지 않기 때문이고 억눌린 욕구와 찌든 스트레스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사실 꿈의 특성상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데(다 기억나면 부끄러울까 내 마음이 다 보여 주지 않는다), 계속 어떤 야한 여성에게 시달린 꿈을 꾸었다. 젊은 여성인 것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이미지가 내 아내인 듯하기도 했다. 참고로 내 아내는 젊지 않은 내 또래의 중년이다.

 꿈을 꾸다 깨니 밤새 시달린 느낌이다. 머리가 무거웠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보니, 꿈에서 그 여성에게 성적으로 유혹을 느끼는데 금지된 대상이기에 갈등을 심하게 느낀 것 같다. 갈등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대체 이 책의 분류는 뭐지,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내용은 동물학자인 저자가 생물학에 기반한 진화라는 관점에서 쓴 대중과학서인데 왜 ‘야동’처럼 내 감성을 성적으로 자극하는 거지, ‘이상하게 야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중년의 발견』저자 데이비드 베인브리지

 어떤 내용이 야한 거지, 다시 책을 들여다 보니, 자주 나오는 핵심 단어가 ‘진화’와 ‘섹스’다. ‘생식은 끝나도 섹스는 끝나지 않는다’라는 장(章)에 보면 ‘성이 아기 만드는 기능을 잃게 되면 남는 것은 인간성뿐이다’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진화론·동물학적 접근으로 인간을 분석하는 저자(영국 케임브리지대 임상수의과 해부학자)의 눈에 인간은 기이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생식과 상관 없는 섹스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에 있어서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라는 것이다, 생물학적 생존이라는 관점에서는 말이다.

 실제로 붉은 사슴 암컷은 1년에 한 번밖에 교미를 못 할 수도 있으나, 그 심드렁한 섹스 라이프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새끼 한 마리씩은 낳는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에 반해 인간 섹스의 80~90%는 임신이 불가능한 시기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특히나 중년의 섹스는 생식이라는 목적과는 먼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자는 인간이 생식적으로 무의미한 시기에도 섹스를 하는 이유는 끝이 없다 이야기 한다. ‘로맨틱한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기분을 더 좋게 만들거나 최소한 기분 전환이라도 하기 위해, 재미 삼아, 고통이나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항하기 위해, 실험하기 위해, 지배력이나 복종심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의사소통 경로를 뚫기 위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등등.

 인간은 ‘불멸의 신 같은 지혜와 이성과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중년인이 없었다면 그런 건 결코 없었을 것이다’라는 15세기 이탈리아 미학자 바티스타 알베르티(1404~72)의 말을 인용하여 저자는 중년인이란 존재의 정체성을 새로운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진화의 원동력은 생존이고 그것은 곧 훌륭한 자손을 낳기 위한 짝짓기와 생식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생식 없는 섹스를 하는 중년 인간은 생존 차원에선 젊은이에 비해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 다른 점은 단순한 생식을 통한 생존을 넘어선 문화 보존의 욕구가 존재하고 중년 인간은 그 욕구를 최대한 실현할 수 있는 형태로 진화된 모델이라는 것이다.

 중년에 머리가 빠지고 배가 나오며 성 기능이 약화되고 폐경이 오는 것도 젊은이들과 젊은 섹스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닌 중년인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한 변화라는 이야기다. 즉 문화에 대한 몰입 및 그 문화를 젊은 세대에 대물림하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도록 하는 진화론적 결과물이라는 설명이다.

 인간의 고통은 대부분 정체성의 문제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혼돈이 올 때 통증이 온다. 중년이 맞는 두 번째 사춘기 또한 정체성의 혼란이고 슬픔이다. 젊은 세대보다 늙고 노년 세대보다 덜 늙은 슬픈 낀 세대인 중년, 저자는 중년이 이런 과도기적 존재가 아니라 이야기한다.

 중년인은 인간성을 대를 이어 보존하는데 최적화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멋진 설명이다. 중년인 내가 근사한 존재라 느껴지고 내 무의식에 존재하는, 아등바등 억지로 젊음을 유지해 젊은 사람과 경쟁하려는 욕구가 불필요하단 생각까지 든다.

 그러고 보니 어제 내 꿈에 나온 여성은 바로 나였던 것 같다. 억지 젊음을 벗어 던지고 중년을 받아들이는 무의식의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심리서가 아닌 대중과학서가 내 무의식에 작용하여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중년이란 단어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 것이다. 재미있는 책이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윤대현  불안과 걱정을 잠재울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내 인생에 대한 강력한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하는 정신건강의학자. 인간이 살아가며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불안·슬픔에 대해 심리철학·뇌과학·정신의학을 기반으로 이해와 위로를 제공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마음 아프지 마』 『나는 초콜릿과 이별 중이다』를 냈다.

중년이란 ? 밑줄 긋기

중년(重年), 단어 자체로는 무겁지만 수백만 년 진화의 잣대로 보면 행운의 시간이다. 『중년의 발견』이 말하는 ‘중년의 축복’을 간추렸다.

 “생명은 발생과 함께 시작하고 노화와 함께 끝나며, 중년은 그 두 가지가 가장 두드러지게 충돌하는 특별한 단계다” (48쪽)

 “다윈이 살아 있다면, 턱수염 사이로 현명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건 자연선택이 중년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생에서 자식의 성공을 촉진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중년은 진화한다. (설령 대다수 사람들이 아기 낳기를 그만두는 나이를 넘어선다 해도 그렇다.) 문화적 전승은 번식 능력이 부여한 중요성을 훨씬 뛰어넘는 진화적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부여한다.” (71쪽)

 “중년인은 누구보다도 검약하다. 중년인이 살찌는 이유는 너무나 에너지 효율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생식 활동이 줄어듦에 따라 인간은 더 적은 에너지를 소모하게끔 자신을 재구성한다. 이게 자신의 생존을 촉진하기 위함인지, 자식에게 소중한 양식을 양보하기 위함인지 모르지만, 중년인이 매우 소량의 음식을 필요로 하는 이유인 건 맞다.”(107쪽)

 “중년의 뇌는 진정 성공작이다. 들어오는 감각 정보가 너덜너덜 해져가고 내부 처리 과정이 과거와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는 않지만 유전적 발생과 관련한 생명의 시계는 사고 과정을 과감히 재구성하여 50, 60대에 잘 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게끔 뇌를 자극 자극한다. 중년의 뇌는 인지력의 절정에 도달한다. (128쪽)

 “인간은 흔히 생식적으로 무의미한 시기에도 섹스를 한다. (중략) 대다수 중년인의 성적 기관은 적정한 수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생명의 시계’는 커플이 자식 생산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마저도 성적 메커니즘을 멀쩡하게 작동시킨다. 이 역시 인간의 섹스는 단순한 생식을 휠씬 뛰어 넘는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명백한 증거다” (212~215쪽)

 “중년의 바람기는 새로운 파트너를 유혹하는 것보다 기존 파트너를 조종하는 것이 목적인 경우가 더 많다. (중략) 역설적이게 파트너가 남들 눈에는 덜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성적 질투는 중년기에 더 강해지고 더 유의미해질 수 있다” (309~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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