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세금으로 산 책 60만 권이 해마다 폐기됩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공공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줄을 치거나 음식물을 떨어뜨리는 정도는 약과다. 사진을 오리거나 일부를 통째 뜯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프리랜서 공정식]

24일 오전 대구 중앙도서관. 책을 점검하던 사서 박경(46·여)씨가 수험서적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 『몬스터 토익』이라는 책을 뽑아 들었다. 올 5월 도서관에 들어와 그동안 5명이 빌려 본 새 책이었다. 책장을 넘겨보니 온통 형광펜과 볼펜으로 줄과 동그라미가 쳐진 페이지가 나타났다. 70쪽부터 73쪽까지가 전부 그랬다. 박 사서는 “새 책이어서 어떻게든 복구해야겠지만 버려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도서관에 온 지 5개월 된 책이 폐기처분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훼손된 것이다.

 2010년 3월에 들어온 『신국제법 강의』라는 책은 688쪽에서 713쪽까지가 아예 뜯겨 나갔다. 대출자가 자신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뜯어내고 반환한 것이다. 이 책은 결국 버려지게 됐다.

 ‘내 것이 아니면 막 써도 된다’는 생각이 아직도 버려지지 않은 것일까. 공공도서관의 책 훼손이 심각하다. 중앙일보가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울산의 공공도서관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이들 7대 도시 공공도서관에서 지난해 1년 동안 62만8660권이 훼손돼 폐기됐다. 도재환 울산남부도서관장은 “버리는 책 대부분은 대출자들이 험하게 다루거나 고의로 책장을 찢어낸 것들”이라고 말했다. 책 자체가 오래돼 낡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찢어지거나 낙서를 하거나 음식물이 묻거나 해서 못 쓰게 됐다는 소리다. 책 한 권 구입 비용이 1만원 안팎인 점을 감안하면, 대출자들이 공공도서를 마구 다루는 것 때문에 한 해 수십억원의 예산을 써야 되는 셈이다.

 지난해 폐기한 62만8660권은 7대 도시 공공도서관이 보유한 전체 2621만9338권의 2.4%에 해당하는 수치다. 도시별로 버린 책 수는 서울이 31만5000여 권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대구(10만6900권), 부산(7만9600권)의 순이었다. 버리는 책은 대부분 ㎏당 100~130원을 받고 폐지로 팔거나 태워 없앤다. 음식물이나 오물이 많이 묻어 재활용하기조차 힘든 책들이 소각 대상이다. 일부는 사서들이 물수건으로 오물을 닦고 테이프로 찢어진 페이지를 붙여 산간·도서지역 학교나 도서관에 보낸다.

 훼손되는 책은 주로 어린이 서적과 자격증·시험 관련 서적이 많다. 어린이 책은 유아들이 책장을 넘기다 무심코 찢는 일이 잦다. 수험서적은 일부분이 통째 뜯겨나가고, 곳곳에 밑줄이 쳐져 있는 게 다반사다. 수험서적에 대해서는 과연 공공도서관이 비치해야 하는 것이냐는 논란이 있다. 자격증을 따는 등 개인의 이익을 위해 보는 책인데 각자 사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수험서는 또 훼손이 잘 돼 ‘도서관 예산 잡아먹는 하마’라 불리기도 한다. 이런 점 때문에 공공도서관들이 ‘문제집 같은 개인적인 책은 구입하지 않겠다’고 공지도 한다. 그러나 “돈 없으면 공부도 못하느냐”는 항의에 밀려 수험서를 계속 구입하는 실정이다.

 반납할 때 점검을 철저히 해 책을 망가뜨리면 벌금을 물리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게 공공도서관의 설명이다. 하루 1000권 넘게 밀려 들어오는 책을 2~4명의 직원이 일일이 점검하기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동 반납기를 이용할 경우는 아예 점검을 할 수 없다.

 경북대 이성신(문헌정보학과) 교수는 “금연정책처럼 공공도서 관련 공익 캠페인을 만들어 시민의식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윤호·차상은 기자

7대 도시 공공도서관 훼손 실태
내 것 아니란 생각, 찢거나 더럽혀
몇 달 안 된 새 책도 금세 누더기
인력 부족 … 사실상 적발 불가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