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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현장취재…70만 교포 성공과 실패의 자취|미주(16)|아르헨티나에 정착한「무전여행 5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붸노스아이레스=김석성 순회특파원】붸노스아이레스에서 피복군납업에 종사하고 있는 젊은 사업가 신창규씨(32·본적 서울 서대문구 연희 동339)는 아르헨티나 이민치고는 이색적이었다. 그는 6년 전 서울에서 녹색 하나를 달랑 메고 7개월 동안 세계를 무전여행 끝에 아르헨티나에 정착하게 된 것. 그의 말을 빌면 아르헨티나 이민은『어렸을 때부터 세계를 여행하고 싶었던 꿈이 이뤄진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5년의 세월을 참고 보냈다.
처음 세계무전 여행의 계획을 세운 것은 서울체신고교를 갓 졸업한 때인 1959년 3월. 같은 학교동창인 유승규씨(32·로스앤젤레스에서 식료품상 경영)두 함께 여행을 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였다. 사라와크 열대림의 벌목인부로 자원도 해보고 아프리카의 말라가 쉬 공화국에 기술이민으로 가는 길도 탐색해 보았다.
그때마다 병역미필이 출국수속의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여행은 군을 제대할 때까지 연기하기로 했다. 수도사단에서 3년 동안 복무한 뒤 제대한 날은 63년 1월.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여행계획을 짰다. 먼저 아르헨티나에 있는 친지를 통해 아르헨티나 석유회사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당시 외무장관 겸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씨를 무턱대고 방문했다. 3시간을 기다린 끝에 비서실의 호의로 정 총리를 면담한 그물은 열변으로 정 총리를 이해시키는데 성공했다.
외국여행은 처음 김이어서 무전 여행차림 치고는 우습기 짝이 없었다고 신씨는 그때를 되새겼다. 장비는 마치 등산이나 하는 것처럼 텐트, 곤 로, 마른 식량에 워커가 2켤레, 이렇게 짐을 차리고 보니 1인당 장비가 자그마치 58㎏이나 됐다. 돈이라곤 한 은에서 지급 인정받은 1백 달러 가운데 그나마 장난감 같은 페트리·카메라를 1대 사고 보니 50달러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앞가슴에는 두 사람 모두『젊은이들의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한 국제친선사절』이라고 영문으로 쓴 리 번을 달고 푸른색 바탕에 휜 실로 KOREA라고 수를 놓은 배낭을 메었다. 막상 출발할 수 있음만큼 출국 수속을 마쳤어도 여비가 없어 해운공사 측의 호의로 화물선 묵 호 호를 타고 싱가포르까지 가기로 했다. 64년 7월4일 부산항을 떠나 자유중국의 기 융 항에 도착한 것은 1주일 뒤.
이들의 방문목적은 자유중국의 일류 지인 중앙일보에 크게 소개되어 뜻밖에도 다음날부터 따듯한 초대의 주인공이 돼 버렸다.
이들은 대 북의 로터리·클럽에 나가『How to promote the internationl peace』란 연 제로 연설도 했고 장경국 행 정원부원장도 면담, 각계 명사들의 소개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덕분으로 향 항에서는 의의로 여행 목적에 효과가 나타나 각계에서 연설과 좌담으로 나날을 바쁘게 보냈다.
향 항에서는 15일 동안에 2천 달러 가량의 사례금을 받아 배를 하직하고 부로까지 갈 비행기표를 사고도 돈이 남았다. 태국에서는 주로 불교사원에서 무전 취식을 하면서 보내다가 기차 편으로 다시 말레이시아에 갔다. 말레이시아 페낭에 도착했을 때 동행인 유씨가 말라리아에 걸려 서울을 출발한지 처음으로 호된 고생을 했다. 무전여행자 숙소에 병든 유씨를 뉘어놓고 빵을 구걸하러 다니기도 했다.
이런 때에 그들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중국인 인삼행상인 두 모씨와 알게되어 인삼차행상의 제의를 받았다. 말레이시아 전역을 차를 타고 다니면서「앰풀」에 담겨있는 인삼차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신씨는 아침의 어시장에 나가 단상에 올라서서『한국인이 파는 한국의 명산물 인삼차를 사보세요』라며 은근한 선전을 했다. 그랬더니 반응은 뜻밖에 좋아 하루아침에 7백50 달러 어치를 팔았다.
그는 말레이시아에서 15일 동안에 무려 2만 갑(7만 달러)의 인삼차를 팔았다는 자랑. 행운은 기적으로 찾아와 이들 무전여행 팀들에겐 또 인도·파키스탄·이란·아프리카 경우의 비행기 표를 사게됐다.
아프리카의 콩고를 거쳐 남아연방의 케이프타운에 이른 것이 64년 12월 중순께. 여행에 지친 그들은 어느 날 항구에 나가 공짜 배편이나 얻어 탈까하고 우두커니 부두를 바라만 보다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그 무렵 브라질로 항해중의 한국이민선이 운 좋게도 케이프타운 항에 기항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선장에게 사경해서 가까스로 승선, 이들이 이민들과 함께 목적지인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것은 65년 1월12일 께.
그는 지금 붸노스아이레스에서 68년이래 공군을 상대로 넥타이 와이샤스 등 피복을 주로 납품하는 군납업을 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69년의 군납실적은 양말 28만개 등 8백20만 페소(한국 화폐가치와 거의 같음)70년에 3백80만 페소, 올해에는 6백40만 페소 어치의 제품을 군납했다.
신씨는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군납에 성공한 것도 말레이시아의 무전여행 길에서 인삼을 판 경험으로 붸노스아이레스의 거리에서 행상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겸손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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