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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6. 갑신정변 다시보기(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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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외자도입을 통한 경제개발과 위로부터의 개혁을 우리 역사상 최초로 도모한 갑신정변(1884)에서 19세기 이래 오늘에 이르는 한국의 모든 정부의 원형적 특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박노자 교수는 흥미롭게도 박정희.김일성 정권이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모두 높게 평가하는 공통점을 보인다고 지적하면서 남북한 모두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비판합니다.

이에 반해 허동현 교수는 메이지 유신이나 5.16 군사 쿠데타처럼 갑신정변도 성공했다면 평가가 달라지지 않았겠느냐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1885년 초 일본 망명 시절의 갑신정변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朴泳孝.1861~ 1939).서광범(徐光範.1859~ ? ).서재필(徐載弼.1864~1951).김옥균(金玉均.1851~1894).

요즘에는 갑신정변(1884)을 긍정 일변도로 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명 개화를 전적으로 긍정하는 근대화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청년 정치가들의 돌발 행동은 국내 개화 세력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혀 갑오경장(1894) 때까지 개혁 활동이 진척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으니, 좋게 평가할 수 없을 겁니다.

최초의 양반 출신 개신교 입교자이자 동경 외국어 학교의 한국어 교사이며 성경 '마가복음'의 언문 번역자이기도 한 이수정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어학 천재 윤치호는 '반역자의 잔당'으로 지목돼 1885년 외국으로 떠났으며, 당대 최고의 국제법 전문가 유길준도 1892년까지 연금(軟禁)에 묶여 있어야 했습니다.

정변의 주역인 김옥균.박영효 등이 근대화를 위해 일하지 못하게 된 것은 차치하고라도, 조선에 몇 없던 이수정.윤치호.유길준과 같은 '외국통'들의 활동이 차단되거나 제한된 것이 큰 손실이었다는 것이지요.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우선 일본군에 의지한 점이 큰 흠이고, 정변의 주체들 중 상당수가 훗날 일본의 조선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사실도 정변의 '민족적 명분'을 파괴한 중대한 과실입니다.

1883~84년 간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학교에서 공부한 뒤 갑신정변의 행동대로 활동하여 민씨파 대신들의 피를 손에 묻힌 정란교.이규완.신응희 등 박영효 계통의 인물들이 도(道)장관(현 도지사).중추원 참의와 같은, 식민지 시기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벼슬자리를 두루 역임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에 일본을 '근대화의 선배이자 모델'로 생각했다가 점차 '아시아의 맹주''조선 근대화의 후견인'으로 인식하게 된 그들을 두고 '소신 친일파'라 칭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별 인기 없는 관점인 인간주의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정변 주모자들이 저지른 민가(民家) 방화와 그 사건으로 인해 청.일 양국 군대가 충돌하여 무고한 백성 1백여 명이 희생된 일은 잔혹 행위로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정변의 행동대원으로서 손에 민씨파 대신들의 피를 묻힌 서재필 같은 인물이, 평생 자신들의 혁명 참여를 자랑만 할 뿐 자기 손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참회의 뜻을 한 번도 피력한 적이 없는 것은, 근대화 지상주의자들이 사람 목숨을 얼마나 가볍게 여겼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불과 몇십년 전 박정희 시대의 관(官)학자들은 갑신정변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가령 박정희에게 '국방 사관(史觀)' 위주의 국사를 강의했던 이선근(李瑄根:1905~1983)은 김옥균을 '우리 나라 근대화 운동의 용감한 선구자'로 이해하고 갑신정변의 실패를 '우리 나라의 자주적 근대화의 실패'로 간주했습니다.

박정희와 김일성, 모든 면에서 대립 관계에 놓인 이 두 정치적 라이벌은 흥미롭게도 갑신정변 평가에 있어서는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북한에서도 김옥균과 그 측근들을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반(反)봉건 인물로 인식하고 그들의 정변 시도를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남의 군부독재와 북의 유일 사상 체제의 구조적인 상통함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표피적 이념 등은 많이 달랐지만, 국가 주도하에 대중을 동원하여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단기간에 부국강병형(型) 근대 공업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근본적인 발상은 같았던 셈입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모형대로, 국가가 무소불위의 힘을 바탕으로 근대성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두 독재자가, 한국사상 최초로 부국강병 프로젝트를 체계적으로 구성한 김옥균과 박영효 등을 선각자로 인식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결과지요.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요즘 남한에서 갑신정변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이미 독재시대의 근대 지상주의적 사관에서 크게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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