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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문화다] ① 예술로 커가는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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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꿈의 오케스트라는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클래식 음악교육을 하는 한국형 ‘엘 시스테마’다. 지난 15일 서울 S구청 꿈의 오케스트라 초등학생 단원들이 연습하고 있다. >> 동영상은 joongang.co.kr [최승식 기자]

문화예술-. 더 이상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학교에서, 동네 도서관에서, 마을회관에서 직접 작품을 만들어보고 감상하는 사람과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이른바 문화가 생활인 시대다. 그 변화의 현장을 돌아봤다.


20일 오후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유스 오케스트라’와 한국 ‘꿈의 오케스트라’의 합동 공연. 빈곤 청소년 음악교육으로 유명한 베네수엘라 엘 시스테마가 함께해 화제가 된 이 공연에 비올라를 연주하는 초등학교 6학년 기영(12·가명)이도 참가했다. <중앙일보 21일자 14면

 기영이는 엄마 없이 아빠하고만 살아 왔다. 그러다 지난 여름 집안에서 ‘끔찍한’ 일을 당했다. 관할 S구청은 기영이를 보호하기 위해 아빠로부터의 격리를 결정했다.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기영이는 그 사건 이후 한동안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를 꺼렸다고 한다.

 기영이가 아픔을 잊고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음악 교육 덕분이다. S구청 꿈의 오케스트라는 지난해 초 결성됐다. 음악 감각이 또래보다 뛰어나고 누구보다 연습에 열심이었던 기영이는 올해 초 꿈의 오케스트라 전국 대표를 뽑는 오디션도 거뜬히 통과했다. 원조 엘 시스테마와 협연할 아이들을 뽑는 오디션이다. 10개월 간 밤잠을 설쳐가며 연습했다. 그 실력을 20일 밤 발휘했다.

 이날 기영이가 연주한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등 6곡. 수백 명 청중 앞에서 무사히 공연을 마친 기영이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열심히 연습해 내년에도 베네수엘라 형들을 만나자고 같이 연주했던 친구들과 약속했다. 그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의사 표현이 분명하지 않고 신경질적이었던 옛날의 기영이 같으면 상상도 못할 변화다.

 자라나는 청소년을 정서적으로 살찌우는 문화예술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소외 계층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 늘고 있다. 예술교육이 심리적 안정을 가져와 아이들이 빗나가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무한경쟁 사회의 그늘을 문화예술 교육으로 밝히자는 취지다.

 S구청 꿈의 오케스트라는 2010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한 꿈의 오케스트라 사업에 따라 창단됐다. 저소득·한부모 가정 등 클래식 음악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악기 연습은 물론 1년에 한 차례 공연기회를 제공한다.

 오케스트라 단원의 70%는 소외 계층 아동으로 채운다. 전체 소외계층 아동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기영이 같은 아이가 전국적으로 1000명쯤 된다.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고교 2학년 나이인 재현(17)군은 요즘 ‘남자학교’를 다닌다. 기타리스트 신대철, 요리사 박찬일 등 유명 문화예술인이 다섯 달, 20회에 걸쳐 자신의 전문 분야를 교육하는 통합 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부모가 없어 성남의 한 청소년 쉼터에서 지내는 재현군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드시 대학에 가야겠다는 절실함이 없었다. 하지만 남자학교에서 좋아하는 연기파 배우 안석환씨를 만난 후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그는 “연극영화과에 가려고 두 달 전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치유를 위한 청소년 문화예술 교육은 민간으로도 번진다. 1995년 발족한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사장 김종기)은 그 동안 강연을 통한 교육과 상담에 주력해왔다. 하지만 올해 들어 학교 폭력을 주제로 한 뮤지컬 ‘유령친구’를 제작해 중·고등학교에서 공연한다. 딱딱한 강연보다 재미라는 요소를 가미한 교육 효과에 주목한 것이다.

 공공 부문의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은 2005년부터 본격화됐다.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이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이 법을 근거로 설립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올해의 경우 30여 개 사업에 1000억원을 쓴다. 이중 60% 정도가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에 투입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역시 예산이 문제다. S구청 꿈의 오케스트라는 공간이 없어 팀파니 등 큰 악기는 창고에 보관하다 연습 때만 꺼내 쓴다. 어린 고사리 손들이 악기를 넣고 빼다 힘이 빠진다는 얘기다. 정부 지원이 3년만 이뤄지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 오케스트라 관계자는 “정부 지원이 끊기는 내년 이후를 대비해 민간 후원자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숙명여대 김세훈 교수(문화관광학부)는 “정부의 예산 지원만 탓하다가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 지원에서 문화 분야는 다른 분야에 밀릴 가능성이 커서다. 김 교수는 “결국 문화예술 교육에 대한 민간 후원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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