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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엔딩 스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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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그녀는 예뻤다. 미인을 일컬어 양귀비도 울고 갈 미모라 하던가, 미스코리아 뺨친다 하던가. 아무튼 그만큼 예뻤다. 능력 또한 탁월했다. 그런데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 가운데 떠오르는 유망주로 지목을 받던 그녀가 결혼과 동시에 갑자기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공부 더 해서 멋진 스펙을 만들어 오겠다며 웃으며 떠났다.

 7년이 지난 엊그제, 웃으며 떠난 그녀가 우울한 얼굴로 멋진 스펙 대신에 사내아이 하나만 달랑 데리고는 돌아왔다. 굴전과 막걸리를 앞에 놓고 마주한 그녀. 할 말도 사연도 많았다. 결혼하자마자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다 수포로 돌아갔고, 살림도 그리 녹록지 않고.

 잘나가는 회계사 남편은 말 그대로 집에선 잠만 자고 회사에만 잘 나가는 바람에 공부는커녕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객지에서 스트레스만 쌓여가고.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같이 일했던 친구가 일본 출장길에 들렀단다. 추리닝 바지와 운동화 차림에 아이까지 달고 나간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세련된 차림에 넉넉함까지 몸에 배어있는 친구. ‘잘나가는 남편에 귀여운 아들까지 둔 네가 부럽다’는 친구의 칭찬도 그냥 고깝기만 하고, 그 친구가 그저 부럽기만 하더라고. 여자가 일을 택하건, 결혼을 택하건 서로를 마냥 부러워하는 건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네버 엔딩 스토리’인가 보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남편을 붙잡고 시작한 하소연. 결국엔 하소연이 말다툼이 되고 나중엔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내뱉게 되고.

 ‘내가 당신과 결혼만 안 했으면 지금쯤 당신보다 더 성공했을 거야. 그런데 내 꼴 좀 봐. 다 당신 탓이야. 맘 편히 목욕 한 번 못하며 하루 종일 아들과 쌈질만 하고 있으니’.

 ‘누가 그러랬어? 일을 포기한 것도, 아무런 대책도, 준비도 없이 애를 낳은 것도 다 너야. 내 탓 하지 마. 난 희생을 강요한 적 없으니까’. 둘의 대화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고 결국은 이혼 서류를 내려고 서울로 돌아왔다는 그녀의 사연이다. 그것도 쓸쓸한 이 가을에 말이다.

 ‘부잣집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때 누가 내 손을 잡아줬더라면’ ‘날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그와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잘못된 결과에 대해 언제나 내 쪽은 잘못이 없다. 가난한 부모, 날 외면한 이웃, 날 유혹한 사람과 술. 다 내가 아닌 남 탓이다.

 이렇게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게 되면 해결책은 내 손에서 떠나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가 문제를 떠넘긴, 바로 그 남을 통해 얻을 수밖에 없다. 과연 그게 가능은 할까. 일어난 문제가 다 내 탓이라 인정을 해야만 문제 해결이 가능한 건 아닐까.

 그녀를 어제 다시 만났다. ‘언니, 우리 잘 해결됐어. 좋은 직장 버리고 결혼해 아이 낳은 것도 다 내가 결정한 것이니 누굴 탓해. 이제 아이도 내가 키우고 일도 다시 할 거야. 만약에 결혼 안 했으면 이런 예쁜 아이는 영영 없었을 것 아냐. 그건 더 끔찍해’. 결혼 전과 비교해 보니 남편과 자기 자신의 신분(?) 차이가 너무 커져서 약이 올라 이혼은 못하겠더라는 그녀. 일단은 남편과 비슷한 수준까지 자신을 채운 다음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겠단다.

 ‘그동안 열심히 내조한 나를 생각해서 잠시만 기러기로 떨어져 살고, 이혼을 하더라도 그때 다시 생각해 보고, 육아는 친정 도움 좀 받고 2년 동안만 열심히 공부해 나의 찬란했던 과거를 되찾을 터이니 당신이 좀 도와 달라’ 했더니 ‘내 도와주고 팍팍 밀어주겠으니 열심히 하라’ 했다나. 예상치 못한 남편 반응에 기운이 펄펄 난다는 그녀. 못마땅한 결혼생활을 남편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쿨’하게 자기 탓으로 인정하면서 멋지게 새출발하려는 그녀. 일을 택하건, 결혼을 택하건, 결혼도 하고 일도 하건 모든 건 각자의 선택이며 결과물 또한 각자의 책임이다.

 작년 한 해, 33만 쌍이 결혼하고 11만 쌍이 이혼을 했으며 그중 성격 차이가 가장 큰 이유였다는 통계가 나왔다. 결혼과 이혼의 시점이 다르기에 결과 분석이 좀 애매하긴 하지만 대충 3쌍 중 1쌍이 이혼한다는 건데. 가장 큰 이혼 사유인 ‘성격 차이’의 그 성격을 각자가 ‘내 성격 탓’이라 여긴다면 상황이 좀 바뀔라나.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