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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제 11화><경성 제국 대학>(10)강성태<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늘어나는 한국인>
법과 9회의 김영년씨(경인 개발 주식회사 사장)는 학부2학년 말 시험 볼 때 일인학생에게 시험지를 보여주어「커닝」을 하게 했다 해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여러 달 동안 도서관에 틀어박혀 혼자 공부를 하여 재학 중에 고등고시에 합격한 수재로 소문이 났었다. 고시를 준비하는 법과 생들이 도서관에 몰려있었고 이 바람에 도서관에는 어디는 누구자리라고 아주 자리가 지정되어 있어 다른 학생은 점유권(?)이 있는 구석 자리는 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때 참고서적을 찾아오는 심부름을 하던 어린이가 지금은 검찰청의 모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어 지금도 가끔 만나면 옛날생각이 새롭다는 고재호씨의 회고담도 들었다.
경성제일고보(현 경기 중 전신)졸업생으로 입학 때와 재학 중에 줄 곧 수석을 차지했던 김재완씨는 대표적인 노력형으로 대학에 나오 때 점심은 물론, 저녁 밤참까지 3개의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녀 밤9시가지나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고등고시준비를 했다.
「도서관의 주인 김군」이란 「닉·네임」이 붙기까지 한 김씨는 재학 중에 고시에 합격, 전도가 촉망되던 법관이었으나 해방 전 펫병으로 고인이 되고 말았다.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정진태(재북)는 법과에 다닐 때 경제사·재정 금융론 등 경제학계 등의 학과목을 선택한 괴짜였는데 해방 후 소위「민주주의 민족 전선」의 대표적인 존재로 한민당 거물급이던 김병노·서상일씨 등과 설전을 펴기도 한 기억이 난다.
민복기씨는 원래 8회에 졸업할 것이었으나 고시 때문에 1년 휴학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는 취직도 어렵고 해서 1년 정도 늦게 졸업하는 것은 예사로 알았다.
이때 졸업생들은 취직할 업체가 없어 이력서 한번 못써 본 사람이 반이 훨씬 넘었다.
당시 옛과는 만주의전과 학부는 구주제대와 해마다 친선축구시합을 가졌는데 한국학생이 대부분인 경성제대 옛과 축구부와 중국학생이 대부분인 만주의전 축구 부와 시합을 가질 때는 나라 잃은 두 나라 학생사이에 무언중에 오고 가는 깊은 정이 있어 친선「무드」가 조성되었다.
고재호씨는 봉천에 있던 교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술대접을 받고 서로 붙잡고 울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하고 있다.
10회 졸업생가운데는 법과에 이도형(일신 산업사장·홍대 재단 이사장) 박정구(전 교통부차관·고인) 윤봉수(청주 대학장) 전지용(전례용씨 제·피납) 정운갑(국회의원) 이명섭(가톨릭의대 교수) 윤종대(전 변호사·고인) 남상학(한양대교수) 이응규(전홍 대 사무처장)문과에 최재희(서울대 교수) 이의철(서울대 교수) 김동석(평론가·재배) 김사엽(경북대 교수) 오영진(시나리오 작가) 이석곤(이대교수), 의과에 김영언(개업) 박태석(개업) 배영설(개업) 송례근(재 이디오피아) 신태성(개업) 이명복(서울의대교수) 이윤응(개업·냇과) 조규찬(전남의대교수) 강처일씨(고인) 등이 있었다.
1936년 경성제대 졸업생으로 금성진군이 제1호로 의학 박사학위를 얻었고 다음으로 이세규군(1회) 김능기군(1회) 진병호(3회)씨 등이 의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지망자가 많아짐에 따라 38년부터 정원이 1백50명에서 2백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때까지의 지원 상황을 보면 6회때가 지원자 1천80명에 1백41명이 합격했고 7회 때는 1천1백2명에 1백48명, 8회 9백70명에 1백61명, 9회 1천12명에 1백48명, 10회 7백73명에 1백46명 11회 8백49명에 1백44명, 12회 8백39명에 1백52명, 13회 8백61명에 1백45명, 14회 8백82명에 1백59명 등이었다.
일본학생과 한국학생의 수는 계속 일인이 많았으나 해나갈수록 한국인의 수가 약간씩 붙어 났다.
3회에는 일인79명에 한국인 51명의 졸업생 비였고 4회에는 88명에 38명, 5회 80명에 56명, 6회86명에 45명, 7회86명에 37명, 8회95명에 60명, 9회 1백6명에 40명, 10회 86명에 45명, 11회 35명에 19명, 12회 80명에 45명, 13회 85명에 38명, 14회 80명에 45명 등으로 개교 초의 3대1비에서 2대1비로 줄어들었다.
11회 졸업생이 적은 것은 옛과가 2년에서 3년으로 연장되는 바람에 졸업생이 없을 것이었는데 재수생 또는 학사 편입한 학생들이 졸업생이 되었다.
11회 졸업생 가운데 법과에는 문과 졸업 후 법과로 편입한 윤영구·남흥우(고대교수 윤보선씨 사위) 문과에 한관숙(고교장) 의과에 김자중(개업) 안용일(개업) 윤창현(개업)씨 등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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