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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싱어 히든 마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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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주철환
JTBC 대PD

“그 프로 재밌던데요.” 직원들에게 이런 인사를 받으면 금세 화색이 돈다. “녹화할 때 방청할 수 없나요.” 이런 요구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철야의 기억도 무뎌진다. 무거웠던 걸음이 빨라지고 입에선 휘파람이 나온다. 군자 되긴 참 어려운 직종이 예능PD다.

 어쩌면 하루살이, 아니 한 주(7일)살이라 해도 무방하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말라(人不知而不<614D>)’던 공자의 말씀은 가혹한 주문이다. 눈길을 안 주는데 계속 전파를 ‘낭비’한다면 그건 이 바닥에서 대역죄다. “호응을 못 얻는 자 무대를 떠나라” ‘PD명심보감’이 있다면 맨 앞장에 이런 말이 적혀 있을 것이다.

 JTBC에서 ‘히든 싱어’를 연출하는 조승욱PD는 한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가 연출한 오디션프로 ‘메이드 인 유’가 제로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한 탓이다. 꽃미남 송중기 MC에, 상금은 사상초유의 백만 달러. 화제성은 충분한데도 반응은 없었다. 채널 인지도가 어떻고 편성시간이 그렇고. 이런 건 패장의 유언에 불과하다. 조PD의 겨울은 꽤나 춥고 서러웠다.

 불행은 행복의 예고편이라 했던가. 반면교사였던 그가 기사회생했다. 미약한 채널환경을 감안하면 만루 홈런에 가깝다. 절망의 표본에서 졸지에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 장난 삼아 ‘메이드 인 유’를 환기시키려 하자 그가 제동을 건다. “금기어는 삼가주세요. M자만 들어도 식은땀이 나거든요.” 그러나 그에겐 지금 M 대신 H(‘히든 싱어’의 두음)가 있다.

 ‘히든 싱어’의 흡인력은 모창자의 탁월한 실력과 원곡가수의 겸손한 매력에서 나온다. 제목 자체에 두 가지가 ‘숨어’ 있다. 숨어 살아야 했던 전국의 모창능력자, 그리고 그들 속에 숨어서 얼굴을 가려야 하는 유명가수.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실행에 옮기기까지 상황이 호락호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PD는 종종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 ‘히든 싱어’에서 고양이는 오리지널 가수다. 말이 좋아 ‘숨는’ 것이지 무대 뒤에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통 속에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다. 그 불편한 공간에서 가창력을 뿜어내야 하는 처지. 아무리 모창을 잘하는 아마추어가 시중에 소문나 있더라도 흉내 내는 프로가수가 ‘내가 어떻게 저들과 한 통 속에 들어가란 말이야’ 한다면 프로그램은 미완의 아이디어에 그칠 수밖에 없다.

 문득 기억의 회로 한편이 작동한다. ‘숨은 엄마 찾기’다. 1990년대 전 국민을 웃기고 울렸던 ‘그리운 어머니’. 자기 어머니가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수많은 젊은 병사들이 무대로 달려 나와 ‘우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라고 외쳤던 그 프로그램.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도 그들의 ‘부정직함’을 나무라지 않았던 그 시절. 시청자는 왜 그토록 관대했을까. 그리움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절절했기 때문이다.

 상상해 본다. 만약 어머니를 숨기지 않고 그냥 무대로 불러냈다면 어땠을까. 재미와 감동은 절반으로 줄었을 터이다. “과연 누구의 어머니일까.”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궁금증. 가짜 아들들의 재치와 재롱. 드디어 진짜 모자상봉이 성사되는 순간 ‘우정의 무대’는 어머니가 가져온 떡보따리보다 더 달콤한 감동을 선사했다.

 ‘히든 싱어’ 역시 핵심은 사랑이다.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들의 유대감을 통해 우리는 눈물 없던 시절로 수학여행을 떠난다. 기억 속의 멜로디는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든다. 이문세는 자신보다 더 이문세처럼 노래하는 모창자를 보며 ‘혹시 내가 저 사람의 인기와 명성을 훔친 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들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히든 싱어’는 가수에게 초심을 되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가 이렇듯 과분한 인기를 얻게 되다니. 그런 면에서 그가 잠시 웅크렸던 통(박스)은 ‘겸손과 감사의 상자’라 부를 만하다.

 가끔은 받아쓰기를 해보자. ‘있다’와 ‘잊다’는 발음이 똑같다. ‘없다’와 ‘업다’ 역시 장단이 다를 뿐 발음은 같다. 있는 엄마를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없어진 줄 알았는데 실은 등 뒤에 업고 애타게 찾아다닌 건 아니었는지. 하기야 ‘히든 싱어’건 ‘히든 마더’건 진짜 가수, 진짜 엄마를 찾는 게 최종목표는 아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가 찾는 건 진짜 사람, 진짜 사랑이다.

주철환 JTBC 대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