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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에 그린 '예수의 생애' 연작 탄생 … 100주년 맞아 다시 만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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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기창이 그린 ‘예수의 생애’ 연작 중 ‘아기 예수의 탄생’. 운보는 “때는 6·25 전쟁의 가열로 온 민족이 고통의 나날을 보냈던 1952년 전북 군산의 피난처였다. 나는 전북 군산의 처가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화필로 달래며 어서 이 땅에서 전쟁이 끝나고 통일된 평화가 오기를 기원하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사진 서울미술관]

천의(天衣)를 입은 가브리엘 천사가 바람을 일으키며 마리아를 찾아왔다. 한옥 방안에서 물레질하던 마리아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녹색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었다.

 운보(雲甫) 김기창(1913~2001) 화백의 ‘예수의 생애’(1952∼53) 30점 중 첫 장면 ‘수태고지(受胎告知)’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는 장면도 갓 쓴 요셉과 쓰개치마 쓴 마리아가 짚풀 무성한 외양간에서 아기를 돌보는 모습으로 그렸다. 양치기 대신 동네 아낙들이 잔치하듯 음식상을 차려와 산모를 돌본다. 기독교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우리식 성화(聖畵)다.

갓 쓴 요셉, 쓰개치마 쓴 마리아

운보 김기창

 6·25가 나자 운보는 아내 우향(雨鄕) 박내현(1920~76)의 친정이 있는 군산 인근 농촌 마을인 구암동으로 피난을 갔다. 이 무렵 그는 조선시대 풍속화를 닮은 30점의 성화를 완성했다. “나는 물론 온 국민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 시기에 예수의 행적을 그려보는 것도 계기가 될 것 같아”라며 성화를 그리는 것으로 암울한 시기를 이겨 나갔다.

 당시 운보는 미군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초상화 한 점에 4달러, 그나마 1달러 50센트는 소개비로 떼였다. 그러나 그 시절 그는 성화뿐 아니라 ‘복덕방’‘엿장수’ 등 전통 한국화의 평면 구성에서 탈피, 입체적 구성의 한국화로 혁신을 이뤘다.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이 운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 미술관 소장품인 ‘예수의 생애’ 연작을 비롯해 운보의 시기별 주요 작품 60여 점을 전시한다. ‘태양을 먹은 새’ ‘태고의 이미지’ ‘춘향 시리즈’ 12폭 병풍, ‘문자도’ 등이 나왔다.

 ‘예수의 생애’는 운보 사후 이듬해 열린 덕수궁미술관의 추모전 이후 11년 만에 공개되는 것이다. 전시 제목은 ‘예수와 귀먹은 양’, 7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은 운보가 침묵과 고독의 세계를 이겨내고 가장 한국적인 동시에 한국화의 지평을 넓힌 화가로 자리매김한 점에 주목했다.

과감한 면분할과 단순화한 형태로 전통 한국화의 현대화를 꾀한 운보의 1970년대작 ‘세 악사’.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운보의 어머니는 듣지 못해 배우지 못하는 장남에게 글을 가르쳤고, 17세가 되자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의 문하생으로 들여보냈다.

 운보는 화단 입문 반 년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예순 넘어서는 청록산수에 우리 민화를 접목, 대담한 생략과 해학이 돋보이는 ‘바보산수’를 발표했다. 대가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는 모색과 실험을 시도했다.

“나는 작가정신이 어린이가 되지 못하면 그 예술은 결국 죽은 것이라는 예술관을 가지고 있어요. 바보란 바로 덜 된 것이지요. 예술도 끝이 없는 것이어서 언제나 덜 돼 있을 수밖에 없지요”라고 했다.

 그는 84년 어머니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내수읍에 한옥을 짓고 거기서 만년을 보냈고, 먼저 간 부인과 함께 그곳에 묻혔다. 사후 12년, 청원군 ‘운보의 집’은 일부 경매에 넘어갔고, 운보재단 및 작품 저작권 또한 유족의 손을 떠났다. 한때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에 꼽혔던 그의 그림은 그만큼 위작이 나돌아 빛이 바랬다.

부암동 서울미술관 내년 1월까지 전시

 서울미술관 이주헌 관장은 “우리 미술관이 운보를 대표할만한 기관은 아니지만 ‘예수의 생애’ 연작을 중심으로 탄생 100주년전을 꾸렸다. 2만여 점에 달하는 운보의 전작 중 전시로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라고 말했다. 전시장 말미는 운보재단에서 빌려온 유품들로 꾸몄다. 그가 즐겨 신던 빨간 양말과 아리랑표 흰 고무신도 나왔다. 양말 뒤축에 구멍이 나 있었다. 전시는 17일부터 내년 1월 19일까지. 성인 9000원, 초·중·고생 7000원. 02-395-0100.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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