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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제자는 필자>|<제9화>우정 80년|강직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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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초의 한국 우표>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 총국이 제대로 일도 해보지 못 한 채 문을 닫자 화려했던 모든 계획은 일장 춘몽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 직원으로 채용됐던 일인 2명에 대한 처우와 일본에 주문했던 우표가 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 대금 지불이 골치 아픈 문제로 등장했다.
일본인 오미는 월급 1백원 「미야자끼」는 70원으로 당초 3년 기간으로 계약되었지만 우정 총국이 문을 닫은 뒤 할 일 없이 되었다.
넘어져도 빈손으로 일어날 일본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 2명은 갑신정변 때 서울에 있던 일인 거류민들과 함께 인천으로 재빨리 난을 피했지만 혁파령이 내리고 세상이 가라앉자 곧 시끄러운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 대리 공사 「곤도오」 (근등진서) 는 이들의 고빙약정서 초본과 함께 미 불 임금 지불을 요구하고 계속 고용하겠느냐고 우리 정부 통서 독판에게 따졌다. 미 불 임금이라는 것은 갑신년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 동안 월급과 여비를 한푼도 받지 못 했다는 주장이었다. 우정 사무에 전력을 기울이던 홍영식 선생이 5개월 치 월급을 주지 않았을 리도 없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월급과 여비 한푼 받지 않고 5개월씩 참았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독판 김윤식은 이와 같은 생떼에 대해 약정서 원본을 제시하라고 점잖게 거절했으나 곤도오 대리 공사는 원본은 갑신정변 때 없어졌다고 변명하면서 한술 더 떠서 5개월 치 밀린 월급 9백30원과 그 동안 출장 여비 54원40전, 갑신정변 때 우정 업무 수행에 필요한 서적과 표식류를 모두 분실, 동경에 가서 새로 사야하겠으니 왕복 3개월 치 여비 7백원과 6개월 치 월급 1천2백원을 선불해줄 것 등 모두 2천8백84원40전을 은화로 달라고 뻔뻔스럽게 요구해왔다. 이러한 억지에 대해 김윤식은 밀렸다고 주장하는 5개월 치 월급만 청산하고 이들 2명은 해약되었다고 「곤도오」에게 통고해 버렸다. 「곤도오」는 이에 대해 그날로 만족한다고 전해와 그들의 검은 뱃속을 스스로 시인하고 말았다.
또 한가지 골치 아픈 문제는 일본에 주문했던 우표가 우정 총국이 없어진 다음에 도착, 그 대금을 요구해온 것이다. 당초 우리 정부는 음양 태극장 도안으로 된 5종류의 문위 우표 2백80만장을 일본에 주문, 그중 2만장은 우정 총국 개설 이전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머지 2백78만장이 우정 총국이 없어진 다음해인 1885년3월 2개의 궤짝에 실려 왔고 동시에 일본은 대금으로 은화 7백58원92전과 지폐 15원71전1리를 요구해 왔다. 우리 정부로서는 우정 사업을 곧 재개할 형편이 못 돼었으므로 쓸모 없는 이 우표가 반가울리 없었다. 계속 대금 지불을 독촉하면서 일본측은 가끔 우체 사업을 다시 열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우정 총국은 없어졌으나 전납이 있는 이상 갚겠다고 약속했지만 대금을 마련할 길이 마땅치 않았다. 한해를 넘긴 우리 나라 정부는 1886년 대금 조달의 한 방법으로 이들 우표를 인천에 있는 독일 상사 세창 양행에 불하하기로 작정했다.
이때 불하하기로 한 우표 수량은 25문 짜리 50만장, 50문 짜리 50만장, 1백문 짜리 30만장 등 모두 1백30만장이었다. 세창 양행은 함부르크의 상인 메이어가 경영하던 것으로 일찍부터 홍콩·상해·천진 등지에서 기반을 갖고 있었고 1884년 인천에 지점을 개설한 후 기선·전신 기기 등 주요 물자의 매입과 금전 대여를 우리 정부에 주선하여 정부와는 인연이 있는 양상의 하나였다.
이 결정에 대해 고종 황제는 『우리 우표를 타국에 발매할 필요는 없다』고 반대함으로써 일단 취소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결국 세창 양행에 불하했다. 세창은 앞으로 우표를 다시 찍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사서 이 우표를 외국의 수집가에 팔아 재미를 볼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 판매 대금이 얼마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우리 정부는 1886년2월3일 일본측에 우표 대금을 청산하고 일본 대장성 인쇄국이 보관하고 있던 우표 원판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우리 정부는 4월중에 원판 18개를 인수받아 당시 우체 사업 주관 청이었던 농상공부에서 다시 통신원으로 옮겨 보관했으나 1905년5월 통신 사업권이 일제에게 강탈당한 후 이 원판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정 총국이 없어진 후 국내 통신은 종전의 역체 조직으로 되돌아갔으나 역체 제도가 날로 문란해진데다 외국 기관의 이용에도 불편한 점이 많아 1895년 전우총국이 설치됨으로써 10년만에 우편 사업이 재개되었다.
전우총국의 최고 책임자로는 형조 판서 조병직이 임명되고, 국내 체신 총판에 외무협판 이용직, 국외 체신 회판에는 미국인인 내무 협판 구례가 임명되었다. 구례의 원이름은 「그리트·하우스」, 일본 「요꼬하마」 주재 미국 영사로 있다가 고종 27년11월 우리 나라 정부의 내무 협판으로 임명되었고 그 뒤 대한 제국의 법무 고문으로 재임 중 사망한 사람이다. 또 기미 3·1운동 때 민국 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었던 오세창씨가 이때 전우총국의 비서 과장으로 있었다. 오 선생은 이때부터 체신계와 인연을 맺어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우정 사업에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고마운 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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