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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를 위한 선의의 후원? 다 꿍꿍이가 있더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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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호 14면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가 젊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먼저 알아보고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면서 귀족 및 저명인사들과 함께 식탁에 앉도록 허락하는 등 극진한 대우를 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집어든 책이 이은기의 『르네상스 미술과 후원자』다. 책은 그런 낭만적인 생각 따위는 던져버리라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활발한 예술 후원으로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 이유 없는 ‘선의의 후원’ 따위는 없었다는 말이다. 하기야 깐깐한 은행들이 무턱대고 예술가에게 돈을 퍼줄 리가 있겠는가.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46> 이은기의 『르네상스 미술과 후원자』(시공아트, 2009)

“신과 이윤을 위하여”
르네상스가 태동할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중세 상업혁명을 통해 신흥 상인계층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부는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세습 귀족의 부를 크게 능가하게 되었다. “신과 이윤을 위하여”라는 문구는 신흥 상인 계층들의 입장을 잘 설명해 주는 문구다.

당시 기독교 윤리에 따르면 ‘이윤 추구와 이자소득’은 파문에 해당하는 죄였다. 경제활동의 범위가 봉건제를 넘어 초기 자본주의로 이행해 가고 있었지만, 관념의 세계는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 이 어긋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가 맞물려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문화와 예술이었다. 이윤 추구의 죄를 씻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교회의 건립과 장식’을 위한 후원이었다. 후원은 죄를 씻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묘를 교회에 안치”할 수 있는 특권적인 보상으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생기기 시작한 교회 안의 가족예배실은 이제 후원 가문의 명성과 금액에 의해 위치가 정해졌다.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시작된 행동은 “사업으로 번 돈을 자선사업에 기부한다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고, 이윤을 추구하고 재물을 쌓는 행위는 선한 것이 되어갔다.

문화예술은 더욱 적극적인 자기 옹호와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수단으로 진화해 갔다. 피렌체나 로마 같은 중심권 문화의 취향은 다른 중소 군주의 ‘과시욕’을 자극했다. 책은 메디치 가문에만 포커스를 두지 않고, 르네상스 시대의 ‘이유가 분명한 후원’의 양태들을 두루 살핀다. 신흥 상인 계층, 각 도시의 군주들, 신식 교양을 갖춘 인문주의적 교황들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문화적 욕망에서 끊임없는 미술품 수요가 생겨났고, 예술가들이 신바람이 나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1 베네초 고졸리의 ‘동방박사의 예배’(1459~1461)

후원자 요구와 예술가 창의 사이에서
르네상스 미술 후원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이다. 메디치가를 정초한 코시모 메디치(1389~1464)는 미술·건축·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 종사자들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단테, 페트라르카 등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사상을 기독교 교리 내에서 포섭하는 지식의 융합을 주장했다. “서로 이질적인 분야를 접목해 창조적ㆍ혁신적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기업 경영 방식”을 의미하는 ‘메디치 효과(Medici Effect)’라는 말은 코시모의 적극적인 예술 후원에서 시작됐다. 평민 출신에다 기독교 교리와 부딪치지 않으면서 이자사업 합리화를 모색하고 있던 메디치 가문이 ‘가치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문화운동을 후원하는 것은 당연했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글보다 미술은 더욱 효과적이었다. 화려하고 장대한 미술작품은 메디치 가문의 미화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소수의 경제사학자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 입에서 21세기인 지금도 그들의 이름이 회자되는 것은 미술과 문화를 통해 그들이 영원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메디치 가문에서 가장 예술품 후원을 많이 한 사람은 16세기의 코시모 1세(1519~1574)다. 앞서 언급한 코시모의 먼 방계 후손이었던 코시모 1세는 더 이상 은행업에 종사하는 평민이 아니었다. 그는 투스카나 지방을 통치하는 군주였다. 전 세대보다 더 막강해진 권력을 행사하던 그의 예술 후원은 “17세기 절대왕정의 후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대적이고 노골적이었다.” 1565년 코시모 1세의 아들 프란체스코의 결혼식은 놀라운 미술 이벤트였다. 며느리는 당시 유럽의 최강국, 신성로마 제국 카를 5세의 친척인 조반나. 이 결혼을 위해 51명의 화가와 25명의 조각가, 15개소의 목공소가 동원됐다. 외교 관계에서 안정적인 입지점을 마련해 줄 보증수표인 며느리를 맞이하는 자리, 성대하게 맞이하는 것이 무엇이 대수랴!

문제는 그곳에 간 사람들이 겪었을 시각적인 충격이다. 신부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 열 개의 아치, 승리의 기념주, 기마상, 분수들을 만들어서 장식했다. 메인 홀의 천장에는 바사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승리의 월계관을 받고 있는 코시모 1세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의 제목은 대놓고 ‘코시모 1세의 신격화’를 말한다! 이 그림 외에도 “존경받는 정치가 아우구스투스, 정의와 힘을 상징하는 헤라클레스, 과단성 있는 지도자 모세 등 역사·신화·종교상의 인물들”이 총동원돼 코시모 1세를 찬양한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일원 중에서 가장 왕성하게 미술품을 주문했지만 모든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데 있었다.

2 동방박사의 예배 (부분) - 로렌조 메디치 3 동방박사의 예배 (부분) - 코시모 메디치(좌)와 피에르 메디치(우)

예술 후원은 자식을 키우는 일
현대의 한 수퍼 리치 컬렉터는 자신이 “부르주아들을 불쾌하게 하는 작품”들을 주로 수집한다고 말한다. 오랜 컬렉션 경험으로 구매자 취향에 아부하지 않는 작품, 어떠한 경우에도 예술가가 특유의 촉수로 포착한 인간적인 진실이 담긴 작품이 나중에는 미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에 가장 적합한 태도를 가졌던 사람은 아마도 메디치 가문의 정초자 코시모 데 메디치였을지도 모른다. ‘국부(國父)’라고 불리며 존경받았던 선대 코시모의 열린 후원은 코시모 1세의 닫힌 후원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물론 그도 자신의 이미지가 멋있게 그려지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작가를 후원한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오토, 마사초, 브루넬레스코가 르네상스의 원근법 및 근대적인 회화 기법을 창안해 내는 데 천재성을 발휘하게 할 수 있는 마당을 깔아주고 거기서 발생하는 다양함과 새로움을 즐겼다. 예술을 후원하는 일은 자식을 키우는 일과 같다. 세세한 잔소리나 규제보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해 줄 때 아이들도, 문화도 새로운 꽃으로 피어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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