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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첼레트 vs 마테이 … 칠레 대선 '장군의 딸들' 맞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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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40년 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장군의 딸이 있다. 다음 달 17일 열리는 칠레 대선을 앞두고 지지율 1, 2위를 달리고 있는 미첼 바첼레트(62) 전 대통령과 에벨린 마테이(60) 전 노동부 장관 이야기다. 이번 칠레 대선은 소꿉친구에서 아버지의 원수로 이후 정적이 된 두 후보의 한편의 드라마 같은 대결이다.

바첼레트 전 대통령은 4년 만에 정권 탈환을 기대하는 좌파 진영이 내세운 의심의 여지 없는 ‘최선의 카드’다. 어렵게 올해 대선 레이스에 합류한 마테이 후보는 ‘한참 떨어지는 약체’라는 우려를 뒤로하고 의외의 선전을 보여주면서 보수 진영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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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후보는 어린 시절 함께 자란 막역지우였다. 두 가족의 인연은 1958년엔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1400㎞ 떨어진 한 공군기지에서 시작된다. 이웃집에 살게 된 두 가족은 각별하게 지냈고, 산티아고로 돌아온 이후에도 한 동네에 살면서 교류를 이어갔다. 또래였던 두 후보는 서로의 아버지를 ‘삼촌’이라 부를 정도였다.

 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두 후보의 운명은 엇갈린다. 바첼레트의 아버지인 알베르토 바첼레트 장군은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정부에서 요직을 지냈다. 이 때문에 군사 정권의 주된 표적이 됐다. 공군 군사학교에 감금돼 고문을 받았고, 74년 사망했다. 당시 이 학교의 총책임자는 마테이 후보의 아버지인 페르난도 마테이(88) 장군이다. 마테이 장군은 이후 피노체트 정부의 핵심 통치기구였던 군사위원회에 참여했고 보건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가 옛 친구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을 받는 이유다.

피노체트 독재 때 다른 길 간 공군장성 둘

칠레 시민단체는 마테이 장군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며 단체소송을 내기도 했다. 지난 7월 재판부는 “마테이가 알베르토 바첼레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바첼레트 후보는 “재판부의 결정을 받아들인다”고만 답했다. 한때 ‘페르난도 삼촌’으로 부르던 아버지의 친구를 믿는다는 발언은 끝내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직후 바첼레트도 정보기관에 끌려가 신문을 당했다. 칠레대학 의과대학생으로 사회당원이었으며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옛 동료들의 도움으로 어머니와 함께 75년 호주 망명길에 오른다. 4년간 호주와 동독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이 시절 만난 남편과 결혼해 79년 칠레로 돌아왔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아 5년 만에 깨졌다. 칠레대학에 복학해 학위를 마치고 지역 병원 의사로 조용한 생활을 해왔다.

 쿠데타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 마테이 후보는 영국 런던에서 지내고 있었다. 15년 피아노를 공부한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71년 유학길에 올랐다. 칠레 일간지 라테르세라와의 인터뷰에선 “직업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하이드파크 옆 선생님의 집에서 하루 12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하는 생활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어느 날 피아니스트가 될 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피아노의 뚜껑을 닫은 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테이는 칠레로 돌아와 가톨릭 대학에 입학했고 전공은 경제학으로 바꿨다. 79년 결혼한 경제학자 남편은 칠레 중앙은행장을 지냈고 아버지의 후광은 피노체트 하야 후에도 이어졌다. 명문가의 딸로 살면서 탄탄대로를 걸어온 셈이다.

바첼레트 부친 의문사 … 소꿉친구 운명 갈려

 둘의 서로 다른 삶을 보여주듯 패션 스타일도 대조적이다. 바첼레트는 패션엔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일 정도로 단조로운 정장을 즐겨 입고 풍채도 넉넉하다. 게다가 ‘국민 할머니’를 노리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친근한 화법을 구사한다. 수더분한 동네 아주머니 같은 인상이다. 반면에 마테이는 화려한 옷을 즐겨 입는다. 마른 체형에 상당한 미인이기 때문에 대중이 거리감을 느낀다는 평가도 나온다. 점진적 증세와 평등·낙태 허용 등을 약속한 바첼레트와 공약도 정반대다. 마테이는 가족과 전통을 중시하고 낙태는 의료적 이유로만 허용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책적으로는 성장과 칠레의 도약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적 성공은 바첼레트가 먼저 맛보았다. 88년 정계에 입문한 그는 이미 2006년 대통령에 당선돼 임기를 마쳤고 이후 유엔 여성기구 초대 대표를 지냈다. 그의 정계 복귀는 불투명했지만 돌아온다면 압승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반면에 마테이는 이번 대선에 막판 합류한 다크호스다. 88년 중도 보수 정당인 국가혁신당(RN)에 입당하면서 정치인이 됐지만 대선행 티켓을 쥐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89년 하원에 당선되고 잠시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지만 세바스티안 피녜라 현 칠레 대통령과의 불화로 탈당했다. 피녜라가 마테이의 당내 입지를 무너뜨리기 위해 준비하던 작전이 폭로됐고, 이는 양쪽 모두에게 상처만 안긴 정치 스캔들로 비화했다. 마테이는 기반세력이 전혀 없는 독립민주연합(UDI)에 입당했고, 대권의 꿈은 접은 것처럼 보였다.

이번 대선 티켓은 당내 대선 후보 경선 1위 후보가 우울증을 이유로 돌연 사퇴하면서 극적으로 다시 쥐게 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출마였기 때문에 스스로도 당황한 기색이 짙었다. 한 인터뷰에 나와 후발주자로의 어려움과 시간 부족을 털어놓을 정도다.

체형·옷차림부터 공약까지 ‘극과 극’

 이런 이유로 마테이가 7월 대선 출마 선언 당시 실시된 여론조사에선 국민의 70%가 바첼레트의 압도적 승리를 예상했다. 하지만 최근 여론조사에선 마테이의 지지율이 25%까지 오르는 등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바첼레트 후보가 33%를 얻어 여전히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최소한 굴욕적 승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가 과반을 얻지 못하면 2차 결선투표를 실시해야 하는 칠레 선거법상 두 후보만이 2차 결선을 치르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3위 후보 지지율은 15% 정도다. 결선투표에서 이 표가 어떻게 나뉘는지에 따라 둘의 운명도 갈릴 전망이다.

 여기에 18일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마테이가 판세를 뒤집을 기회가 몇 번쯤은 올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마테이는 이를 의식하듯 7일 바첼레트가 발표한 ‘15개 부문 50개의 공약’에 대해 “장황하고 중복된다”고 비판하며 선제 공격을 시작했다. 18일 이후로 예정된 대선 TV 토론에서 두 장군의 딸들이 어떤 대결을 펼칠지도 관전 포인트다.

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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