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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CEO, 왜 이렇게 만나기 어렵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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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

호텔 입구에서 행사장까지 100m. 3단계 작전을 짰다. ‘차에서 내리면 따라붙는다→덕담으로 경계심을 누그러뜨린다→현안 질문을 던진다’.

 2010년 11월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비즈니스 서밋 때 얘기다.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이 모이는 흔치 않은 행사였다. 정권 초 총수들을 일렬 집합시키는 청와대 간담회가 있지만 경호 때문에 언론 접근은 제한적이다. 이 행사는 그런 제약도 없었다. 기대가 컸다.

 멋진 세단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기자가 말을 걸자 총수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한화 김승연 회장은 거침없는 입담을 과시했다. 당시 진행 중인 검찰 수사에 대해 묻자 “박복한 놈이라 그렇지. 팔자려니 하고 있어”라며 한참을 걷다가 멈춰서더니 다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SK 최태원 회장도 피하지 않았다. 최 회장의 선물투자 손실이 막 세상에 알려진 때였다. 사업 계획을 묻자 한숨을 푹 쉬며 “계획은 무슨…앞으로 건강이나 챙겨야겠어”라고 했다. 후에 닥쳐올 불운을 예감한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게 이날 성과의 전부였다. 대부분은 질문을 받아주지 않았다. 직원들이 총수의 주변을 에워싸며 인의 장막을 친 경우가 많았다. 한 오너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10여 명의 기자를 보고는 ‘놀란 토끼’처럼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명 기업인에게 이렇게 심한 언론 기피증이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물론 돌발적인 기자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게 이해 안 되는 바는 아니다.

 이런 오너들의 성향을 의식한 탓인지 요즘 전문경영인들도 대중 앞에 잘 나서지 않는 경향이 심하다. 얼마 전 인터뷰를 청하며 한 증권사 사장에게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이런 답이 왔다. “한번 나오기 시작하면 힘들어진다. 총수들은 더할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다. 자꾸 나서면 ‘만나자’ ‘행사에 와달라’는 등의 요청이 쇄도한다. 말실수도 걱정된다. 총수들이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국회란다. 정치권이 점점 일감 몰아주기, 경제민주화 같은 기업 때리기에 몰두하다 보니 기업인들의 출석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자주 얼굴을 보였다가는 국회 출석을 거부할 명분이 없어진다. 이번 국감에도 기업인들의 줄소환이 예정돼 있다.

 2002년 초 애플 맥월드에 갔다가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10m 앞에서 들은 적이 있다. 막 출시된 아이팟을 치켜 들며 ‘디지털 허브’의 개념을 전파하던 모습은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의 활발한 대외활동은 유명하다.

 하지만 ‘먼 나라’얘기일 뿐이다. 우리는 30~40대 벤처기업인들조차 대중과 벽을 쌓는다. 마크 저커버그가 가든파티에 기자들을 초청하고, 제프 베조스가 강연을 다닌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NHN 이해진 의장이 등장한 건 본 기억이 없다. 외부 환경 때문일까, 뿌리 깊은 소통문화 부재의 단면일까. 이유가 뭐든 기업인들이 대중과 점점 멀어지는 건 기업 경쟁력에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