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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여정이 얼어붙은 철의 장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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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찬삼 여행기 노르웨이에서 제4신>
며칠동안 여객선을 타고 최북단으로 항해하면서 많은 노르웨이 사람들을 사귀었는데 한결같이 멋진 마도로스가 되겠다는 것이 이들의 이상이었다. 이 지구는 육지보다 바다가 훨씬 많이 차지하여 해구라고 할 수 있다면 노르웨이사람은 이 해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노르웨이의 절경인 노드케이프이란 곶(갑)에서는 태양이 5월의 제2주에서 7월말까지는 지지 않고 그 반대로 11월의 제3주에서 1월의 제3주까지는 보이지 않는다지만 내가 여행하는 계절은 9월 하순이어서 이런 기상을 보지 못했다. 또 북부의 기나긴 겨울철엔 하늘을 장식하는 북극의 오로라의 장관을 볼 수 있으나 역시 계절관계로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최북단에 가까운 어떤 곳에 이르니 깎아지른 듯한 4백여m의 절벽이 나타나는가 하더니 파도가 몹시도 거친 이 북해의 근해에서 노르웨이 어선들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좋은 어장인데 딴 나라에는 어려운 원양어업이 되지만 이 나라엔 근해어업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북해의 고기잡이는 크나큰 고역인 듯 어부들의 모습은 흡사 바다와 싸우는 전사들처럼 보였다.
베르겐을 떠난 지 7일째 되던 날 목적지인 키르크네스 항에 여객선이 닿았는데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 자그만 항구도시는 뽀얀 눈보라에 가려져 신비스러운 한 폭의 묵화처럼 느껴졌다. 대륙의 최북단에서 맞는 눈이기에 유독 겨울의 흥취가 돋보이고 설경이 또한 새로왔다.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에 그려진 것보다 색다른 겨울의 무드가 넘친다.
설레는 북해가 바라다 보이는 이 키르크네스의 바닷가의 풍경은 고스란히 저 유명한 이 나라의 화가 뭉크의 환상적이면서도 멜렁컬리한 그림과도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이런 곳에서 입센의 시를 읊조리고, 또는 그리크의 음악을 듣는다면 더욱 북구의 우수를 실감할 것 같건만 오직 들려오는 것은 바다 위를 윤무하는 해조들의 울음소리며 뱃고동뿐이다.
해조는 분명 삶을 노래할텐데도 어째서 포레나 마스네의 『비가』보다도 슬프게 들리는 것일까. 못 견딜 만큼 한 세계인으로서의 고독을 느끼고 또한 쓸쓸한 이 대륙의 북쪽 끝에서 호독한 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항구도시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세계우정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련과의 국경에 가서 철의 장막의 일부분이나마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국경을 도보로나 차량으로 넘을 때처럼 강렬한 여수를 느끼게 하는 것이 없지만 이 국경은 넘을 수 없기에 파인의 시 『국경의 밤』에 그려진 것 같은 애타는 갈구를 자아낸다.
이 국경에는 버스로 가기로 했는데 명단에만 기록하면 되며 그렇게 까다로운 신원조사는 없으나 동양인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나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그런지 버스여객일행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키르크네스 시를 떠난 버스는 큰길로 달리다가 동쪽으로 뻗친 시골길로 20리쯤 들어가더니 가로질린 개울 앞에서 멎었다.
여기가 바로 국경이었다. 길 앞 은 바리케이드로 막혀있으며 노르웨이와 소련의 철조망사이에는 휴전선 같은 것이 있는데 자동차바퀴 자리나 사람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이쪽 바리케이드에서 약 30m 떨어진 소련 쪽에는 막사가 서있고, 소련군 보초가 이쪽사람이란 아랑곳없이 무표정하게 화석처럼 까딱 않고 서 있다. 노르웨이 쪽에선 보초들이 히터를 쬐고 있건만 소련 쪽에선 장작 같은 것을 때는지 연기가 오르고 있다.
이 국경에서는 무슨 분쟁이라곤 없는지 삼엄하지 않고 평온해 보인다. 이름 모를 새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바흐의 평화스러운 음악에 나오는 플루트소리보다 더 부드러운 노래를 읊조릴 뿐이다.
내가 타고 온 여객선의 사무장도 함께 여기 왔는데 그는 내가 너무나 심각한 표정으로 소련 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니까 내 옆에 다가오더니 말을 건네며 땅위에다 국경지대의 약도를 그리고는 열띤 목소리로 『소련 막사가 있는 저쪽까지 우리 나라 땅이었지요. 2차 대전 때 처음엔 독일군, 다음엔 소련군이 우리 나라를 점령했는데 전쟁이 끝나자 막사 저쪽에 있는 우리의 교회가 탐이 났던지 그 교회를 중심으로 사각형으로 파고 들어와 국경선을 정하지 않았겠어요』하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은 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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