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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새 정치지형도의 모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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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모두들 답답해하고 있다. 그동안 자랑해 오던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이 높은 장벽에 부닥치고 있기 때문이다. 87년 체제의 출범을 자축한 지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국민은 민주정치에 대한 엷은 회의마저 뿌리칠 수 없는 형국에 처하고 있다.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1987년 6월항쟁이 국민적 갈망이었던 권위주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민주정치의 제도화를 위한 전략적 사고나 집행계획 없이 진행된 민주정치 실험이 크게 성공하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민주화 직후인 88년 13대 국회보다 25년 후인 2013년 19대 국회가 다소나마 성숙한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평가는 오늘날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오늘날 지구촌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는 우리만이 겪고 있는 시련은 아니란 것이다. ‘아랍의 봄’이 삽시간에 사막의 광풍과 민중의 열기에 날아간 중동이나, 우리보다 한발 앞서 민주화에 성공했던 스페인·그리스 등 남유럽의 정치·경제의 혼란은 차치하고 선진국을 대표하는 미국정치가 근자에 노출하고 있는 난맥상은 민주주의의 효율성이나 안정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정당 간의 싸움을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충돌로 진전시켜 정부 폐쇄란 극단적 상황까지 치닫게 한 정치위기를 미국시민들이 감내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당사자가 정치게임의 규칙, 즉 헌법적 절차를 존중하고 결국 다음 선거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권에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난 25년에 걸친 한국정치의 실험이 가장 성공적인 민주화의 모범이라는 듣기 쑥스러운 외부로부터의 찬사는 아마도 민주화 초기 노태우·김영삼·김대중, 3대에 걸쳐 헌법을 존중하는 타협의 정치가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민주적 직접선거에서 36%란 역대 최소득표로 당선돼 압도적 여소야대 국회와 함께 국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노태우의 불보다는 물과 같은 자세가 87년 체제를 순조롭게 출범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겠다. 민주화 추진의 두 기수로 자리매김되었던 김영삼은 3당합당, 김대중은 DJP연합이란 헌정 테두리 안에서의 타협과 연합의 정치로 각각 대통령이 되어 국정을 이끌었다. 그 두 번의 연합이 김종필의 참여로 가능했다는 것은 이른바 ‘3김정치’가 87년 체제의 순항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가능케 한다.

 21세기로 들어서면서, 특히 2002년 대선 이후의 한국정치는 경제·사회·이념 모든 면에서 중간을 강화하는 타협과 통합보다는 양극화의 심화를 반영하는 격돌의 성격이 짙어졌다. 2만 달러 소득의 함정에 묶인 채로 빈부격차의 확대가 낳은 사회적 불안정은 고전적 계급혁명론이나 반제국주의론과 뒤섞이며 왕년의 민주화투쟁의 향수마저 불러일으키는 위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한편, 북한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상식적 판단능력도 마비되면서 헌정체제 밖으로 튀어나가는 정치활동의 병리적 극단화 증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어렵사리 성취한 87년 민주체제의 기틀을 뒤흔드는 위기에서 여야 제도권 정당과 지도자들이 보여준 대응능력은 지극히 실망스러웠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근자에 정치권과 국민을 흥분시키고 있는 이석기 사건, 국정원 댓글 사건, 정상회담 대화록 논란이 그러한 단정적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한국 민주정치를 정상적 발전궤도에 올려놓으려면 국회선진화법과 같은 입법조치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헌법을 수호하며 국가운영의 책임을 맡겠다는 제도권의 여야 정당이 획기적 내부개혁에 더하여 정치적 주소를 옮겨 새 정치지형도를 만드는 데 힘을 합치는 새로운 통합과 타협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은 어떤 경우나 명분을 불문하고 정보기관이나 권력기관의 정치개입을 완벽하게 예방하는 책임을 완수하는 데 정치생명을 걸겠다는 국민과의 엄숙한 약속으로 극단적 보수층의 지지를 잃을 가능성을 감내하며 우(右)에서 중간으로 주소를 옮겨야 한다. 반면, 민주주의와 헌정수호의 전위대를 자처하여온 야당은 헌정질서의 틀과 정신에 어긋나는 극단적 세력과의 연대를 확실히 끊고 북한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정리하며 좌측극단에서 버릴 면적만큼 중간지대 우측으로 입지를 넓히고 주소를 옮겨 제도권 수권정당의 면모를 정비해야 하겠다.

 87년 체제로부터 여섯 번째 대통령의 정부가 출범한 금년이, 그리고 갖가지 정치적 혼선과 혼란이 한국 민주정치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여야가 함께 새 정치지형도를 그려 나가야 할 때이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