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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고 일단 부인 … 상황 봐가며 수위 조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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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호 10면

“나는 모르는 일이다”(관련설 첫 보도 직후)
“사실이 아니다”(첫 반응 3시간 뒤)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가정부 인터뷰 보도 후)

전문가들이 본 채동욱 전 검찰총장 발언

진실은 확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혼외아들’설에 휘말려 자리를 내놓은 채동욱(사진) 전 검찰총장 얘기다. 임기제 검찰총장 사임이라는 중대 사태의 배경을 두고는 여러 정치적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채 전 총장에게 ‘혼외아들’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실체적 진실만 따져보면 사실이라는 주장 쪽에 더 많은 증거가 쌓이고 있다. 채 전 총장이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뜻이다.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 등 일부 전문가는 채 전 총장의 언행에서 스캔들에 휘말려 거짓말을 이어가다 파국을 맞은 국내외 유명인 사례와 유사한 모습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보도 내용 사실 아니면 첫 반응 더 격했어야”
지난달 6일 조선일보는 “채동욱 총장에게 혼외아들이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당사자인 채 전 총장의 반응은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보였다. 당일 출근 직후 대변인실을 통해 “보도의 저의와 상황을 파악 중”이라는 내용이 문자메시지와 전화로 전달됐다. 오전 8시30분이 되자 대변인실을 통해 나온 ‘공식 해명’도 “혼외아들 보도에 대해 본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정도였다.

한 전문가는 “공인들은 사건이 터졌을 때 모른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쌓아온 지위나 공신력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추후 법적·공적 책임을 의식해 거짓말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는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최대한 모호한 표현을 유지하는 것은 사건의 충격을 완화하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나중에 가장 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어 무난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보도 내용이 전혀 사실과 달랐다면 처음 반응이 훨씬 격렬하고 명확했을 것으로 봤다. 당시에도 이런 의혹이 제기됐다.

6일 오전 일선 검사들 사이에서 “사실이 아니라면 ‘모르는 일’이라는 소극적 해명에 그치겠나” 하는 의구심이 퍼진다는 내용이 여러 언론의 인터넷 속보로 보도됐다. 오전 10시 채 전 총장은 검찰 내부 통신망 ‘이프로스’에 글을 올려 “보도된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밝힌다”며 한층 명확한 표현을 썼다.

상황의 변화를 관찰하며 언행의 수위를 조절한 정황은 또 있다. 첫 보도 후 침묵을 지키던 채 전 총장은 보도 사흘 뒤인 9일 “정정보도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유전자 검사에 나설 용의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뒤 몇 차례나 비슷한 발언을 했지만 실제 소송을 제기한 건 24일이었다. 13일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감찰 지시에 항의해 사의를 표명한 뒤 연가와 추석 연휴를 거쳐 열흘 가까운 침묵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채 전 총장은 지난달 30일 퇴임식에 앞서 정정보도 신청을 취하했다. 채 전 총장은 “공개 법정에서 오랜 기간 진실 공방을 하면 근거 없는 의혹만 확산될 것으로 판단했다. 유전자 검사를 받아 의혹을 없애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의혹 해명의 열쇠가 될 유전자 검사는 소송 등 법적인 강제 조치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진실규명을 회피하려는 것이라는 의혹이 나왔다.

퇴임식 당일에는 채 전 총장의 내연녀로 지목된 임모(55)씨 집에서 가정부 생활을 해온 이모씨의 인터뷰가 보도됐다. 상세한 묘사는 물론 이씨가 채 전 총장에게 받았다는 연하장의 필적 검사 결과 등 강력한 정황 증거도 제시됐다. 하지만 채 전 총장은 변호인단을 통해 “엉뚱한 사람과 착각했을지 모르지만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을 뿐 합리적인 반대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거짓말을 하는 심리적 이유를 분석하는 이론은 몇 가지가 있다.

채규만(심리학) 성신여대 교수는 “인간의 방어기제에서 가장 기초적인 게 ‘부인(denial)’이다.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본능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예상치 못한 사건이나 스캔들에 휘말렸을 때 누구라도 처음에는 부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고 말했다. 오채근(신경정신과) 한동병원 원장은 “큰 사고나 범죄를 경험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환자들도 초기에 현실에 대한 강력한 부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나중에 현실을 천천히 인정하게 되면서 대부분 우울증이나 심리적 위축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일부는 이 단계를 넘어 현실을 계속해 부인하고 자기합리화하는 병적 부인(Pathological denial)으로 이행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 저지르면 자기 행동 부인”
이수정(범죄심리학) 경기대 교수는 특정인과 상관없는 범죄학 이론 중 하나라고 전제한 뒤 ‘중화이론(Neutralization theory)’을 예로 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범죄)을 저질렀을 때 스스로 자기 행동에 대한 해석을 바꾸거나 부인하는 걸 말한다. 이 교수는 “청소년 성추행 혐의를 받은 한 연예인이 ‘피해자가 스스로 차에 올라탔으니 합의된 것’이라고 끝까지 주장한 게 좋은 예다. 피해자가 상황을 예상하고 차에 탄 게 아니라는 점이 누가 봐도 명백한데 이런 주장을 계속 고집했다. 어떤 범죄자는 현장의 폐쇄회로TV(CCTV) 화면을 보여줘도 ‘나와 비슷해 보일 뿐 나는 아니다’라고 계속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법적 사유체계에 기초한 대응
하지만 거짓말에 대한 이런 병리적·심리학적 이론이 채 전 총장에게도 해당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전문가도 명확하게 긍정하지 않았다.

한 신경정신과 의사는 “겉으로 드러난 언행과 지금까지의 경력 등을 종합해볼 때 자아가 무너진 전형적인 병리현상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지극히 자아가 확고한 정상적인 인격”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 전문가도 “살다 보면 누구나 심리적 고통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병적으로 진행돼 실제 언행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면 지금까지 채 전 총장이 성취한 자리 근처에도 못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채 전 총장의 언행이 ‘병리적 반응’이 아니라 심사숙고 끝에 선택된 ‘전략적 대응’일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한 신경정신과 의사는 “법조 최고의 엘리트 중 한 사람 아닌가. 법적 사유체계(legal mind)에 기초해 신중하고 냉정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본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혐의를 받는 것만으로도 무너지지만 법적으로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무죄로 추정하는 원칙을 본인은 잘 알지 않겠나. 현재 상황에서 유전자 검사는 쉽지 않기 때문에 최종적인 진실 규명이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퇴임식에 가족을 동반하거나 여러 차례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것에 주목하는 전문가도 있다. 한 교수는 “해외의 유사한 사건에서 자신에게 쏠리는 관심을 제3자에게 돌리는 행동을 흔히 볼 수 있다. 명백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을 내세워 주변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채 전 총장의 입장 표명이 간접적인 형태가 많은 것에 주목하는 전문가도 있다. 한 의사는 “대부분의 입장이 대변인이나 변호인을 통해 나왔다. 모든 이가 주시하는 상황이다 보니 일거수일투족, 사소한 언행 변화까지 모두 보도되는 지경이 되자 이를 완화하기 위한 대응으로 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입장 표명 없이 침묵을 지키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진실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채 전 총장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거부했다. 이론 설명을 제외한 모든 분석은 익명으로 표기했다. 다음은 취재에 응한 전문가 명단(가나다순).
▶김수동 신경정신과 의사, 노만희 신경정신과의사회장, 배상훈 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 오채근 한동병원 원장, 윤대현(정신건강의학과)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교수, 윤홍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동우(신경정신과) 상계백병원 교수, 이수정(범죄심리학) 경기대 교수, 채규만(심리학) 성신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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