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29)|낙동강 공방전(11)|마산의 위기(1)|「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마산 점령 부산 목 조르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북괴군 제6사단이 호남일대를 휩쓸고 하동·진주에 진출하자 부산의 관문인 마산방어가 급하게되었다. 원래 적6사단은 중공군출신이 기간인 정예부대로서 남침 초에는 옹진·개성·김포·인천을 점령한 다음 천안까지는 서울에서 남하하는 적 제4사단 뒤를 따르다가 그곳부터는 서남으로 방향을 돌려 호남일대를 석권했다. 그리고는 7월25일에는 순천에서 남해안을 따라 부산까지의 진격을 개시하여 하동과 진주에서 급파된 미24사단의 19연대와 조우, 이를 격파했다. 이 하동조우전에서 전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이 전사한 것은 본 연재 83회에서 보도한대로다.
적6사단장 방호산 소장(1953년에 이중영웅칭호를 받았으나 그후 박일우 내상과 함께 숙청됨)은 공격개시에 앞서 『진주·마산을 점령하여 부산 목을 조르겠다』고 장담할 정도로 적 기세는 사나왔다. 이 무렵에 「유엔」군 측은 미 본토로부터의 증원 군이 바로 부산에 속속 도착할 참이었다. 즉7월31일에는 「하와이」의 제5연대 전투단과 제2사단 제9연대, 8월2일에는 제1해병여단, 3일에는 제8072전차대대, 5일에는 제23연대, 7일에는 3개 전차대대가 각각 부산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방호산부대가 부산에 쇄도하게되면 이들 증원부대는 상륙할 항구가 없어진다. 『적이 부산을 뺏는 것이 빠르냐, 「유엔」군 증원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는 것이 빠르냐』의 경쟁, 즉 「분초싸움」의 운명이 마산방면 전투에 달려 있었다.
미전사가 「로이·애플먼」저 『낙동강서 압록강까지』(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에서는 이 「분초의 싸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적6사단이 목포·여수 같은 해안 항구를 점령한 것은 호남지구를 거쳐 낙동강 교두보공격으로 가는 포위부대에 대한 보급을 이 항구로부터 얻기 위한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 「워커」장군은 적이 호남의 항구를 점령하지 않고 그대로 부산에 쇄도했더라면 8군은 이를 저지할 병력을 투입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적6사단이 군산·목포·여수를 점령하는데 소요한 시간은 2일이었다.
이 2일간의 여유가 마산과 나아가서는 부산을 구한 셈이다.』

<워커장군 미군 예비대 투입>
마산방면의 위기를 직감한 「워커」장군은 우선 당시 8군의 유일한 예비대인 미 제27연대(연대장 「존·H·켈리스」대령·현 미8군사령관)와 상륙 예정인 제5연대 전투 단을 이곳으로 증파하여 앞서의 하동·진주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미제24사단의 19연대와 합세, 적6사단의 공격을 요격케 했다.
한편 이 무렵의 적6사단의 기도를 앞서의 「로이·애플먼」저 『낙동강서 압록강까지』와 그 밖의 기록을 통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8월2일 진동리에 보병경비병이 없는 지휘소와 포진지를 발견하고 마산에는 위력 있는 전투부대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때 적6사단은 13연대주력으로 괘방산을 공격케 하고 14연대는 서북산 일대에 잠입시키고 15연대는 예비대로서 후방에 배치케 했다.
미 제27연대의 「체크」대대가 2일 아침에 무촌리에 진출한 것은 뜻밖이었지만 저녁에 철수하자 방호산사단장은 3일에 14연대로 진동리와 마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미군이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보병이 없는 진동리와 마산 점령은 손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래서 적14연대는 일부로 진동리를 주력으로 마산을 공격하기로 하고 3일 아침 1개 대대로 진동리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진동리에는 미군보병이 있었기 때문에 공격부대는 큰 피해를 보고 격퇴되었다. 당황한 적14연대장은 급히 1개 대대를 차량으로 증파했으나 대대장이 전개선의 선정을 잘못했기 때문에 하차 중 미군 화망에 포착되어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이 진동리 전투는 남침이래 불패를 자랑하던 적6사단에 일격을 가하여 콧대를 꺾어놓은 전투였다.
이 전투의 상보를 여러 기록에서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미27연대 본부가 있던 진동리는 남해안으로 뻗은 산맥남단 해안선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북으로는 함안에, 서북방으로는 곡안리를 통해 남강에 이르는 도로의 분기점에 있다. 「체크」중령의 제1대대는 4대의「탱크」를 가지고 무촌리에 위력정찰을 나갔다가 우세한 적과 조우, 교전하면서 철수하여 연대본부가 있는 진동리 국민학교 교정에 진을 쳤다. 교정부근에는 1백55㎜의 A중대와 제8야포 대대도 포진하고 있었다. 8월3일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 갑자기 연대본부와 「체크」대대가 있는 교정을 향하여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사격은 세곳으로부터 집중되었는데 특히 255고지일대로부터의 기총사격은 살인적이었다.

<적 기습에 병사들 차 밑으로>
이 고지에는 미군보초가 있었으나 접근하는 적을 후퇴하는 한국군으로 오인하여 기습을 받은 것이다. 적의 너무나 돌연한 기습에 교정은 삽시간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한미 군이 발광하여 기관단총으로 같은 전우를 난사하여 장교가 그 광병의 팔을 권총으로 쏜 사건이 발생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연대장과 참모장은 차 밑에 숨어 들어간 병사들을 독려하여 전투배치하고 보·전·포의 화력을 조정해서 적 화력을 제압, 간신히 혼란을 수습했다. A중대장「로건·웨스턴」대위는 문제의 255고지를 공격하여 두개의 적 기관총 진지를 강습하여 이를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웨스턴」대위는 세번이나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부대를 지휘했다.
「웨스턴」대위가 255고지를 점령하고 얼마 안 있다가 적병을 만재한 20내지 30대의 차량종대가 함안 도로를 남하하여 진동리 북방 1㎞지점에서 하차하는 것을 발견한 제8야포 대대는 맹렬한 동시 탄착 포격을 가했다. 완전 기습을 받은 적은 산중으로 도피하여 하오1시쯤에는 완전히 섬멸되었다. 이 진동리 전투에서 미군피해는 전사 13·부상 40명인데 비해 북괴군의 유기시체는 6백 이상이었다. 후에 적 포로심문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적 6사단14연대의 2개 대대가 진동리 전투에서 전멸했다. 그중 1개 대대는 진동리를 봉쇄하고 잔여 2개 대대는 마산으로 근접한 곳을 차단하기로 돼 있었으나 미27연대의 선전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 전투 중 북괴군은 서북산에 근거지를 두고 주로 민간통신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방청한 미27연대는 적의 의도를 숙지하면서 싸울 수 있었다. 3일 밤에 미27연대의 작전장교는 적 사단장 방호산이 진동리 공격 실패와 막심한 피해를 본데 대해 14연대장을 맹렬히 질책하는 전화를 도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북괴군의 보급기지가 서북산중의 폐광 촌인 둔덕과 도곡지역에 있다는 것과 적15연대도 마산주변에 침투할 계획이었다는 등의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미25사단 마산추가투입>
한편 미24사단의 19연대와 27연대가 진동리에서 적6사단과 접전하고 있는 동안 「워커」장군은 추가증원부대를 마산방면에 급속히 투입했다. 낙동강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부대의 신속한 이동, 즉 「기동」을 첫손으로 꼽고 있다. 미제25사단의 마산투입은 그「기동」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미25사단은 8월1일 저녁 상주남방으로부터 삼랑진을 향해 전진을 시작했는데 2일 새벽에 「워커」장군은 25사단의 목적지를 마산으로 변경했다. 25사단은 왜관까지는 도보로 행군하고 거기서부터 마산까지는 철도로 수송됐는데 이 「기동」에는 몇 가지 난제가 있었다.
첫째는 적이 미25사단의 전진을 눈치채고 맹공을 가하면 전선이 돌파될 염려 때문에 25사단의 전진이 불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고, 둘째는 사단의 전 진로와 제1기병사단의 주 보급로(MSR)가 동일하기 때문에 이 교통을 어떻게 조정하는가하는 것과 세째는 수송용 철도자재를 어떻게 입수하느냐 등이었다.
첫째 염려에 대해서는 전진기도를 극력 은폐하고 김천부근의 제1기병사단은 경계를 엄중히 하면서 25사단의 전진을 엄호했는데 북괴군은 공격해오지 않았다. 이 지역의 북괴 제3사단은 전날 무모한 주간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미제25사단과 접촉하고있던 적15사단도 포격으로 큰 피해를 보고있었다.

<기동성이 부산 구한 원인>
둘째 문제에 대해서는 제25사단에 우선권을 주고 군사령부의 불급한 장교 전원을 동원하여 교통정리 반을 편성, 그 이동을 관장시켰다.
철도자재입수에 대해서도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당시 철도는 군 보급품·피란민·환자 등의 후송과 동부전선으로 투입되는 한국군 17연대와 미 제21연대의 수송으로 꽉 차있어 25사단 수송열차는 별도로 편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군 수송부에서는 할 수 없이 대구에 온 모든 기차를 징발해서 왜관으로 돌리고 다른 수송은 희생시켰다.
이렇게 해서 25사단의 마지막 적재가 끝난 것이 2일 상오7시였다. 사단은 2일 상오9시15분부터 3일의 하오7시30분에 걸쳐 마산역에 도착, 「킨」사단장은 3일부터 남강 남안에 소재하는 부대를 통합 지휘하도록 임명됐다. 이 25사단의 기동은 불과 36시간에 2백40㎞의 이동을 완료한 것으로, 「워커」사령관은 『전 사상 처음 보는 이 신속한기동이 부산을 구했다』고 늘 자랑했다. 사실 이 기동은 2차 대전 중에도 볼 수 없었던 신속한 이동으로 완전히 적의 계획을 뒤집어엎은 것이었다. 또한 이 기동이 성공한 이면에는 한국 경찰과 철도경비대가 북괴「게릴라」의 준동을 철저히 봉쇄한 공도 컸다.
미25사단이 마산으로 이동하고 있는 동안 막강을 자랑하는 미 해병 제1여단 제1진도 8월2일에 부산에 첫발을 들여놓아 이 부대도 마산방면에 투입됐다.
이래서 오히려 마산방면에서는 「유엔」군의 병력이 적보다 우세하게되어 비극으로 끝난 이른바 「킨」반격작전이 움트게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