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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국민 사위' 함익병이 얄밉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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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철호
논설위원

대통령부터 시작해 사방천지가 여성인 시대다. 요즘 청와대 비서관들은 대학 리포트 제출하듯 보고서를 예쁘게 꾸민다고 한다. A4용지 한 장에 대충 핵심만 담았던 남성 대통령 시절과 딴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퇴근 후에도 보고서를 꼼꼼히 읽기 때문이다. 한 비서관은 “여야 정권교체나 여권끼리 권력 승계보다 여성 대통령으로의 교체가 훨씬 심각한 지각변동”이라 말했다. 적응하기 쉽지 않다는 고백이다. 눈치 빠른 일부는 이화여대 교수를 통해 독신 여성 총장을 잘 모시는 비법까지 따로 전수받는다고 한다.

 여성 시대의 흐름에 제대로 올라탄 인물은 ‘국민 사위’ 함익병이다. 그는 ‘백년손님’과 ‘힐링캠프’에 나와 알뜰살뜰 장모를 모신다. 닭살 돋는 장면이 넘친다. 발톱에 장모와 함께 봉숭아 물을 들였다니 할 말 다했다. “피부에 돈 쓰지 말고, 속을 다스려라”는 어록이 나돌고, 소품으로 등장한 ‘함익병 청소기’까지 불티나게 팔린다. 단박에 ‘고령화 시대의 맞춤형 사위’라는 반열에 올랐다.

 필자는 그와 고교동창이다. 함익병이 뜰수록 겉으론 뿌듯하지만, 속은 엄청 쓰리다. 민폐가 장난이 아니다. 고교 친구 4명과 여행을 떠난 여름 휴가 때의 일이다. 술판의 안줏거리는 단연 함익병이었다. 다들 “익병이 때문에 못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집사람들이 “같이 학교를 다녔는데, 당신은 도대체 뭐냐”며 들볶기 때문이다. 누구는 “익병이는 이과였고, 나는 문과라서…”라며 위기를 모면했고, 누구는 “예능 프로의 편집에 넘어가지 말라”며 선방을 날렸다고 자랑했다.

 ‘공공의 적’에 대한 음해도 쏟아졌다. “익병이는 키도 큰데, 공부한답시고 눈 나쁘다며 맨 앞자리로 옮겼다”는 둥 과거의 사소한 일까지 들춰내 마구 씹었다. 그의 부친은 존경받던 화학 선생님이셨다. “그네 집은 우리들보다 넉넉했는데, 방송에 나와 대학 때까지 고기 한 번 구워 먹지 않았다고 뻥을 치더라”…. 다음날 아침 아무도 후련한 표정은 아니었다. 다들 해장국 앞에서 “그래도 익병이 반의 반은 닮아야 살아남지 않겠니?”라며 쓴맛을 다셨다. 여성 시대에 뒤진 루저들의 비겁한 넋두리다.

 따지고 보면 박 대통령의 집권으로 본격적인 여성 시대가 열렸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해 나가떨어진 경우가 한둘 아니다. 우선 북한이 그렇다. 핵 위협과 개성공단 폐쇄까지, 함부로 덤비다가 돌직구를 맞았다. 그나마 북한은 눈치가 빠른지 재빨리 나긋나긋해졌다. 민주당 역시 본전을 못 건졌다. 여야 영수회담은 물거품이 되고, 54일간의 노숙투쟁에도 촛불은 타오르지 않았다. 야당의 주특기인 ‘피해자 코스프레’는 먹혀들 조짐이 없다. 오히려 고비마다 차영 전 대변인 스캔들, 이석기 사태, 채동욱 혼외자 파문이 터져 찬물을 끼얹었다. 모두 여성인 박 대통령에게 유리한 사안들이다.

 다만 여성 시대의 물살이 너무 빠르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 반작용으로 군 가산점 논란에서 촉발된 남녀 대결은 ‘김치녀’ ‘된장녀’ 같은 여성 비하로 치닫고 있다. 사이버 세계가 소통이 아니라 선동의 공간이 돼 버렸다. 상대방을 설득하기보다 자기 쪽의 상실감과 분노를 자극하는 데 혈안이다. 물론 상대편을 독 오르게 해서 좋을 게 없다. 남성들도 어느 정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이는 타협이 아니라 적응의 문제다.

 어차피 여성 시대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요즘 나도는 ‘중년 여성에게 필요한 5가지’라는 우스개는 이런 시대의 반영이다. 돈·딸·건강·친구·찜질방으로, 남편이 낄 자리는 없다. 반면 남성의 필수항목은 마누라·아내·애들 엄마·집사람·와이프로 도배돼 있다. 남성들의 위기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농담이다. 그만큼 아찔한 속도의 여성시대에 밀려난 루저들이 많음을 의미한다. 가끔씩 박 대통령의 ‘원칙과 신뢰’도 도를 넘는 느낌이 든다. 뒤처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아쉽다. 야당과 북한에도 받아들일 건 받아들였으면 한다. 원칙과 포용은 반대말이 아니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