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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요섭<영 비스 뉴스 특파원>|본사 독점수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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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2월1일-. 납치 된지 열흘만에 처음 목욕을 하고 면도를 했다. 우물가에서 벗어 젖히고 한바탕 기름때를 씻어 냈더니 살 것 같았다.

<첫 목욕 알몸의 단잠>
빨래가 마르는 동안 정글 속에 알몸으로 드러누워 한잠 늘어지게 자는 맛이란 마치「타잔」이 된 기분이었다. 하룻밤을 자고 난 12월2일 아침이 되자 한 병사가 지나가면서『너를 오늘 집에 보내준다』고 말했다.
며칠째 들어온 석방 통고라 믿어야 옳을지 구두 선으로 돌려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속이 들여다뵈는 것 같아 풀어 달라고 애걸복걸 할 수가 없어 담담히 앉아 있는데 장교복 차림이 나타나『당장 떠날 준비를 하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명령대로 떠날 준비를 하면서도 미덥지가 않아 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월맹군 복장을 꺼내 입고 입던 옷은 자루에 처넣었다.

<뺏었던 시계·지갑 돌려 줘>
자루를 걸머지고 나서는 나에게 다시 감시병 4명이 따라 붙었다. 목덜미를 다시 잡히는 듯했다.
맨발로 걸을 수가 없어 호지명「샌들」을 꺼내 신었다. 하오 4시께 당도 한곳이 내가 처음 잡혀 심문 받던 마을이었다. 감시 망 속에 또 하룻밤을 잤다. 12월3일-. 날이 밝자 처음 나를 심문하던 정보 장교가 나타나더니 영어를 좀 아는 중국인 통역을 시켜 다시 캐묻기 시작했다.
나에게서 뭐인지 짜내려고 안간힘을 하다가 가족 상황을 꼬치꼬치 묻기도 했다. 그리고는 『네가 찍는 사진은 어디서 현상하느냐』고 물었다.『홍콩으로 보낸다』고 대답했더니『석방해주면 돌아가서 뭐라고 말하겠는가』고 물었다.『잘 먹여 주고 살려서 돌려보내 준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겠다』고 했더니 지갑과 시계를 내게 돌려주면서 옆자리의 키가 작고 나이가 들어 뵈는 고급 장교에게 인사를 하라 했다. 시키는 대로했더니 그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장교들이 자리를 뜨자 다시 나는 감시병에게 맡겨졌다. 어두컴컴할 무렵까지 아무 기별이 없다가 4명이 또 따라 붙으며 마을을 떠나자는 것이었다.
1킬로 반쯤 떨어진 마을에 가서 이틀이나 묵게됐다.

<감시병 가는 곳마다 교대>
맥이 탁 풀렸다. 어느덧 12월5일이 됐다. 하지만 아무 명령이 없었다.「프레이콜」이라는 곳에 이튿날 (6일) 새벽 4시께 닿았다.
감시병이 또 갈렸다. 숫자는 그대로 4명-. 수세밋 국을 한 모금 들고 새벽 6시에 다시 이 마을을 떠서 다른 마을로 옮겨졌다. 이번엔 감시병이 2명으로 줄었다. 또 한 마을로 옮겨 나지막한 움집 같은 사무실에 나를 인계했다. 그 안엔 검은 복장을 하고 중공 제 AK-47을 든 5명의 베트콩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맞아 들였다.
어쩐지 가슴이 철렁했다. 나를 이곳에 데려다준 2인조가 뭣 인지 흑색의 5인조에게 소곤댔다. 얼핏 들어보니『하오 6시에 출발하여 7번 공로 쪽으로 가라』는 얘기였다.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필시 내가 잡히기 전 논두렁에서 담은 녹음 테이프가 프놈펜으로 간 듯 했다. 그 녹음에 따라 내 목소리와 함께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실종이 캄보디아 방송에 보도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석방해 준다』고 떠벌리면서 릴레이식으로 끌고 다니는 것은 나를 안심시켜 딴 마음 (탈출)을 품지 못하게 하여 어느 목적지로 가는 것이라 믿어졌다.

<시시각각 신분 탄로 위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탈출을 각오 할 밖에 없었다. 나는 태 연을 가장하기 위해 돌려 받은 지갑에서 1백 리엘을 꺼내 담배를 사 달랬다. 담배 한 갑에 7「리엘」이어서 이들에게 여러 갑씩 나누어주고 25「리엘」에 슬리퍼를 사 신었다. 나에겐 장교가 내준 작전지역 통과 증이 있었지만 이것이 진짜인지 알 길이 없었다.
6일 상오 7시20분부터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느닷없이 포탄 세례가 날아들었다. 나는 한 감시병들과 함께 논두렁에 엎드렸다. 우군 포임을 직감하고『찬스다』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감시병들은 포탄 속에서『이곳을 피하자』고 저희들끼리 수군대며 허겁지겁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슬리퍼도 집어던지고 포성이 들려오는 쪽으로 필사적으로 뛰었다.

<포성 향해 3킬로 질주>
내 정신이 아니었다. 3km쯤 뛰다 논길 둔덕에 엎드려 살펴보니 7번 공로가 뻗쳐 있고 정부군수 색조가 나와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월맹군복을 벗어 던지고 두 손을 들어 정부군 54대대에 구원을 청했다. 6일 상오 9시께 였다. 제2의 생명을 얻은 기쁨도 잠깐, 나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되찾아 보니 벌써 7일 하오 2시였다. 벌떡 일어나서 포 연에 휩싸인 밖을 내다보는데 내 등을 툭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이택근 대리 대사가 군복 차림에 권총을 차고 배웅을 나와 있었다.『고생 많았소.』『고맙습니다』-. 내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나는 l5일만에「프놈펜」으로 가는 헬리콥터 위에 있었다. <끝>
【편집자 주=이 수기를 끝낸 이요섭 기자는『나는 죽었다 산몸이다. 제2의 인생을 힘차게 살겠다』는 내용의 글을 따로 보내 그 동안 그의 안전을 걱정해 준 친지들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그는 또 주「캄」한국 대사관·「캄보디아」주재 외신 기자단·기협·사협 등의 따뜻한 구호 노력에 감사한다면서 비스 뉴스의 지시대로 홍콩 총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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