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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적 치하의 3개월 (20)|「6·25」 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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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토지 개혁>북괴가 남한 점령 지역의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 원성을 산 것은 강제 모병과 함께 이른바 「토지 개혁」을 무자비하게 강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한다」는 모택동 이론이 남한에서는 적용 될 수 없었다. 이미 남한에서는 1949년6월21일에 농지 개혁법을 제정, 그 이듬해 3월25일에 시행령이 공포되어 온당한 토지 개혁을 실시했었다. 3정보 이상의 경작 농지만을 5년 기한으로 유상 몰수해서 유상 분배 해준 이 농개법은 세계 선진 민주 국가의 선례를 따르고 우리의 실정을 참작한 적절한 개혁법이었다.
도도히 흐르는 세계 조류 속에서 민주 국가에서도 지주 계급의 몰락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사회의 주축 세력인 지주들에게 공업 자본으로 전용할 수 있는 지가 증권을 주어 급격한 몰락을 막으면서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것이 1949년에 제정된 농개법의 골자였다.
한국 정부가 큰 마찰이나 저항 없이 농지 개혁을 실시한지 반년도 안돼 북괴가 다시 그들 나름대로의 토지 개혁을 강행하여 온 농촌을 벌집 쑤시듯 발칵 뒤집어엎었다.
관계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그들의 이런 토지 개혁법이 대부분의 농민으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촌위 1천8백 조직>
▲김남식씨 (당시 북괴 충남도 당 선전부책·현 김점곤 교수의 안보 국제 문제 연구소 연구 위원·47) 『7월4일자로 발포된 북괴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소위 「공화국 남반부에서의 토지 개혁을 실시함에 관한 개정」에 의해서 경기·강원·충남북·전북 전역에 걸쳐 토지 개혁이 완료됐어요. 그리고 9월3일 현재로 나머지 전남의 2백52개면 중 2백8개면 경북의 2백51개면 중 l백7개면, 경남 2백30개면 중 99개 면에서 토지 개혁이 실시 됐구요.
이상의 지역에서 토지 개혁 실시를 위한 농촌 위원회가 1천8백개 조직됐고 위원 총수는 14만여명이나 됐습니다.
남한에서 실시한 토지 개혁은 46년에 북한에서 한 것 그대로 본떠서 「무상 몰수·무상 분배」로 했지요. 부락 단위로 모두 몰수한 토지를 그 부락 실정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했어요.
49년에 한국 정부가 실시한 것과는 퍽 다르지요. 사실 이때 남한에 대상 지주라는 것은 이미 존재치 않았어요.
그래서 분배 토지의 면적 조정과 농민의 원 지주에 대한 상환 책무를 폐기시켰지요.
북괴는 리 (동) 단위로 머슴·빈농·고용농 등으로 농촌 위원회라는 것을 조직, 토지 등 실정을 조사해서 토지 개혁을 단행했죠.
재배중인 작물까지 분배되는 토지와 함께 처분했어요. 북괴는 8월18일자의 「농업 현물세 실시에 관한 내각 결정」으로 조기 작물은 이미 수확이 끝났으니까 과세를 못하고, 만기 작물에 대해 수확의 25%를 현물로 과세키로 했어요. 그래서 평당 수확고를 산출하려고 벼·조 등의 이삭을 따다가 세라고 했고, 심지어는 익지 않은 채 매달려 있는 감·대추·밤까지도 숫자를 세라고 해서 농민들의 큰 반발을 샀습니다.
괴뢰군은 행군하다가 식량이 떨어지면 군이고 민가고 들러 식량을 압수하고 인수증이란 것을 써 주었는데 그자들의 말인즉 후일 인수증에 적혀 있는 양만큼 현물세를 감면해 준다고 했지만 모두가 허사로 끝났지요.
다음은 토지 개혁을 실지로 겪은 농민들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북괴가 당시 가지고 있는 통계 숫자에 따르면 김남식씨 증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한에서 점령 기간 중 토지 개혁을 거의 완료한 것 같지만 사실은 시작했다가 그대로 그만 두고 후퇴한 경우도 많았다.

<옥토는 열성 분자에 분배>
▲김종기씨 (당시 전북 완주군 조촌면 동곡리서 농업·현 공화당 전북 제1지구당 사무국장·49) 『나는 그때 논 6천평과 밭 3천평에다 과수원 6천평을 경작하고 있었어요. 9월에 들어서니까, 북에서 내려온 북괴 정치 지도원의 지휘 아래 마을의 소위 열성 분자들이 일본인 「강림」이 살고 있던 집 지하실에 모여 무슨 비밀 회의를 매일 열더군요. 그러더니 과수원은 국가에서 몰수한다고 아예 손도 대지 않고 전답은 비옥한 것만을 골라 열성 분자와 그 추종자들이 분배한다고 해요. 그러나 그때는 이미 농사를 지어 놓은 때라 당장 땅을 빼앗지는 않았어요.
현물세를 부과하기 위해 나락에 달린 알을 일일이 세어 이를 기준으로 한 두락에 얼마라는 수확고를 산출 했구요. 그러니 그 산출이란게 엉터리지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완주군 상관면 같은데서는 현물세 기초 조사를 한다고 과수원에 들어가 한 그루에 달린 과일을 세어 모든 주수에 곱해 수확 예상고를 냈다는 거예요. 그런데 과일이 자라면서 풍해나 충해로 피해를 많이 받았는데도 그들은 이를 전혀 참작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밖에도 그들은 닭·돼지 등 가축도 낱낱이 조사해 갔으나 급히 후퇴하는 바람에 빼앗아 가지는 못했습니다.
▲유지섭씨 (당시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에서 농업·현재도 같음·71) 『우리 마을에도 그들이 소위 농지 개혁 위원회를 조직하고 농지 분배와 수확고 조사 등을 실시했어요.
위원장에는 우영주씨 댁 머슴인 백모 (당시·33)를 앉히더군요. 이 자는 「종지 개혁」은커녕 「농」자도 모르는 일자 무식인데 벼락감투를 쓰게 되자, 주인댁 아랫목에 앉아 「이제 내가 위원장이니까 집과 땅도 모두 내 것이 됐으니 빨리 밥지어 올려라」고 주인에게 호통을 쳤다는 거예요. 그들이 말하는 소위 반동 분자들의 토지가 분배 대상이 됐는데 식구비례로 분배한다는 것은 말 뿐, 좋은 땀은 저희들끼리 갖고 나쁜 땅을 나머지 사람들에게 주는 식이었지요』
▲우병주씨 (당시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서 농업·현재도 같음·46) 『강화군은 적 치하에 들어가자마자 곧 토지 개혁과 농작물 조사가 시작 됐어요. 리 단위로 머슴·빈농 등으로 구성된 농촌 위원회가 주동이 되어 일을 하더군요. 토지 개혁은 농촌위에서 각 농가의 토지를 조사하여 갔는데 「누구의 토지를 떼어서 누구에게 더 준다」는 식이었어요. 가정 단위가 아니라 일할 수 있는 사람 단위로 분배했어요. 그러나 실시되기 전에 수복이 되어 잘은 모르지만 농촌위와의 친소에 따라 「좋은 땅을 빼앗기느냐 나쁜 땅을 분배받느냐」하는 쑥덕 공론이 돌았어요.

<장롱·장독까지 바꿔치기>
농작물 조사는 대충 눈으로 보아 9등급으로 매겨 현물세를 징수할 계획이었는데 수복이 돼서 좌절됐지요.
▲이관하씨 (당시 충남 공주군 장기면 송선리서 농업·현재도 같음·52) 『공주 지방에서는 각 부락 인민 위원회가 토지 개혁의 주역을 맡았었지요. 인민위는 대개 머슴과 빈농들로 구성됐는데 이들은 벌써 피난간 부농 집을 차지하고 있었지요.
토지 분배는 15세 이상의 노동력을 가진 식구 수를 중심으로해서 1인당 4백평씩 나눠준다면서 좋은 땅은 자기들이 먼저 갖고 농사지은 것도 수확하면 가져간다고 했어요. 전답뿐만 아니라 가축이며 심지어는 장롱·강독까지 분배한다고 몰수하더군요. 집도 바꿔치기를 했구요. 나의 경우도 전답 1천2백평만 남기고는 나머지 4천여평은 내 놓기로 됐는데 국군이 들어와서 무사했습니다.』
▲정광식씨 (당시 전남 광주시 서산동 상오 상오치서 농업·현 광산군 농협 광주지소 서산동 조합 이사·51) 『7월23일에 북괴군이 광주에 들어온 후 며칠 되니까 시 변두리인 우리 동네에도 농촌 위원회가 생기더군요. 머슴들과 동조자가 7∼8명 모여 경지 면적 대장 등을 근거로 농지를 분배한다고 합데다.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 분자와 부농의 망은 모두 몰수한다고 해요. 나도 30여 두락을 경작하는 부농이니까 꼼짝없이 다 빼앗기게 됐지요. 그때 머슴이나 빈농들이 활개치고 다니며 내 소유의 옥토를 바라보며, 저건 내 것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을 보니 참 기가 막히더군요.
현물세 징수도 벼와 조·수수 이삭의 알을 일일이 세게 해서 산출 했구요. 과수원의 감도 세어갔습니다. 한달만 수복이 늦었어도 농촌 사회는 들통이 났을 겁니다.
▲원준흥씨 (당시 강원도 북산면 거주·현 춘천시 석사동서 양계업·62) 『그때 내가 면장으로 있던 북산면은 38선 접경이어서 이북의 학정을 잘 알기 때문에 토지를 나누어 준다해도 모두 곧이 듣지를 않았어요. 그들은 각 리별로 농촌 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을 강제로 임명했지만 누구하나 앞장서려고 하지 않았어요.

<현물세 독촉하다 맞아 죽고>
아예 도망친 위원들도 있었구요. 이래서 내평 부락에서는 토지 분배의 기초 자료도 조사하지 못한 채 9월 수확기를 맞았는데 그들은 이번에는 현물세 부과를 서둘러 대더군요. 북산면 대동리에 살던 떠돌이 머슴 박남철을 면 인민위원장에, 같은 머슴 한기봉을 부위원장에 앉히고 독려를 했어요. 곡식이 여문 밭이나 논에 나가 제일 잘 된 곳 한평을 골라 줄을 치고는 모두 베어내서 곡식알을 일일이 세게 하더군요. 이자들은 처음에는 내평 부락민들이 말을 잘 안 듣고 반발 하니까, 산골 동네부터 그런 일을 했어요.
더욱이 괴뢰군은 모두 전선에 나가고 부락마다 자치제 같은 것을 실시했기 때문에 부락민들이 꼭 뭉치니까, 저희들도 손 쓸 수가 없었지요. 결국 아까 말한 면 인민위원장과 부위위원장은 현물세 독촉하러 산골 부락에 갔다가 외딴 길에서 둘 다 맞아 죽었어요.
이렇게 해서 북산면의 경우는 토지 개혁이나 현물세 부과가 모두 실패했습니다.

<쌀독·시래기에도 차압 딱지>
▲이상복씨 (당시 충북 진천군 이월면 미잠리서 농업·현재도 같음·54·여) 『나는 그때 어린 3남매를 거느린 여자 농사꾼이었습니다. 우리 동네가 진천 반공 의거 사건에 관련됐다고 해서 그들 내무 서원들의 화풀이 장소처럼 됐어요. 밤이면 부녀자들이 몰래 감자밭에 나가 감자 포기는 그대로 두고 알만 캐다 쪄 먹으며 연명했지요. 9월이 되니까 그들은 부락에 나와 논밭의 모든 곡식에 대해 포기 세기 벼알 세기를 시키데요.
처음엔 벼가 잘 된 논의 벼 포기를 센 다음 다시 가장 잘 자란 벼 포기의 벼이삭을 뽑아 벼의 낟알을 헤아리고 이에 따라 수확량을 계산, 현물세를 부과한다고 하더군요. 밭곡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어요. 정말 수복이 조금만 늦어도 큰일날 뻔했습니다.
※알림=다음 회부터는 적 치하의 「종교학의 수난」을 다룰 예정이오니, 수난 인사들께서 증언을 해주시거나, 관계 자료를 제공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연락처=중앙일보 편집국 「민족의 증언」 담당자 앞. 전화 (28)82l1 (교환)의 74번 야간은(93)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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