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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쉰 나이에 9급 공무원이 됐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서울 노량진의 한 고시학원 강의실. 나이 오십 줄에 이르러 초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려는 중년 수험생들이 크게 늘었다.

100세 시대가 멀지 않았다. 나이 오십을 넘어서면서 은퇴할 시기가 성큼 다가오는데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는가? 그동안 닦아온 전문성을 지역사회를 위해 발휘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 어렵다는 하위직 공무원 시험에 도전해 새로운 성취감을 맛본 이들을 만났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오후 3시는 ‘무언가를 하기에는 언제나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시간’이라 말했다. (…) 오후 3시란 한여름처럼 지치고 나른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다 눈이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워져 자꾸 눈꺼풀이 내려앉는 자정과도 같은 시간이다.” -라파엘 앙토방의 <오후 3시> 중.

한국 사회의 중년 나이를 하루 중의 ‘오후 3시’에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얼마 후면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듯 째깍째깍 정년의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은퇴 후 자신에게 닥칠 일을 체감하기란 쉽지 않다. 아직 일할 수 있는 체력은 멀쩡히 남아있는데 퇴직 후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헤매는 사이에, 과감히 새로운 길을 찾아나선 사람들이 있다.

폭염이 쏟아지던 8월의 어느 날 대전시청의 공보관실. “한글 프로그램에서 작성한 이 보고서에서 표 간격을 줄이려면 어떻게 하지?” “엑셀프로그램에서 이 단축키는 어떻게 사용하는 걸까?”

23년 동안 언론사에 근무하다 지난해 대전시청에서 9급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이웅태(53) 씨. 그는 국가직과 지방직 공무원에 연달아 합격했지만 고향을 위해 일하자는 오랜 꿈을 실현하고자 대전시로 내려갔다.

나이가 지긋한 이웅태(53) 씨가 옆 자리에 앉은 젊은 공무원 유아람(24·여) 씨에게 연신 질문세례를 퍼붓는다. 귀찮을 법도 한데 유씨는 이씨의 물음에 열심히 답해준다.

겉으로 봐선 아버지와 자식 뻘로 상사와 부하 직원처럼 비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이곳에서 공직생활의 첫발을 뗀 9급 공무원 동기다. 알고 보니 지난해 대전시청에 들어온 신참 9급 공무원 가운데 두 사람은 최고령자(이씨)와 최연소자(유씨)라고 한다.

훌쩍 쉰 살을 넘긴 이씨는 기자 출신이다. 그의 동료인 유씨는 이씨가 첫 직장인 신문사에 입사했던 해에 태어났다고 하니 두 사람은 한 세대 차이가 난다. 그런 이씨와 유씨가 새로운 직장에서는 서로에게 배울 것이 많다.

이씨는 23년 동안이나 기자생활을 거친 터라 홍보에 대해 잘 알지만 정작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보니 새로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할 때는 자식 뻘인 동료직원 유씨에게 의지해야 할 일이 많다.

남들이 대책 없이 정년을 기다릴 나이에 공직에 진출해 새출발을 꾀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도 고위직 공무원이 아닌 초급 공무원이다. 해가 갈수록 ‘젊은’ 은퇴자가 늘고 있는 가운데 생겨난 새로운 풍속이다. 보통 은퇴자들은 퇴직금을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데 투자하려 하지만 이를 말리는 사람이 많다. 구멍가게 하나를 내더라도 돈 벌기가 만만치 않아 노후를 위해 써야 할 돈마저 날릴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전시청에서 신참 공무원으로 새 출발한 이웅태씨는 또래의 중년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택했다.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는 20대 젊은이들도 합격하기 어렵다는 하위직 공무원시험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어려운 선택이었던 만큼 성취감은 컸다. 이씨처럼 중년에 각종 국가시험에 응시해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이들은 해마다 늘어난다.

7월 27일에 치러진 올해 9급 공무원 시험에는 20만 명의 응시자가 몰렸다. 공무원 시험 상한연령제한이 폐지된 이후로 수험자 수는 매년 늘어난다.

공무원시험 연령제한 폐지가 새 기회 제공

7월 27일 치러진 2013년 9급 공무원 시험에는 전국에서 20만4698명의 응시자가 몰렸다. 경쟁률이 무려 74.8대 1이었다. 이 시험에 목을 매는 젊은이도 많지만 눈에 띄는 새로운 풍경은 40~50대 중·장년 층의 응시자가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다. 안전행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공무원 시험 나이 제한(급수별 28~32세)을 없앤 첫해인 2009년 2538명에 불과하던 40~50대 시험 응시자 수가 5년째인 올해는 3배가 넘는 7984명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에 전체 응시자 수가 14만879명에서 20만 4698명으로 늘어난 데 비해서 훨씬 높은 증가세다. 그 때문에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도 더욱 치열해졌다. 연령제한이 있던 2008년까지는 평균 경쟁률이 40대 1 수준이었지만 2009년 이후로는 80대 1로 경쟁률이 갑절로 높아졌다. 합격자의 문이 더 좁아진 것이다. 40~50대의 합격률은 2009년 4%(98명)에서 2012년 7.9%(159명)까지 뛰어올랐다.

중·장년층들의 초급 공무원 시험 도전 열기는 학원가에서도 확인된다. 서울지하철 1호선 노량진 역에는 각종 고시학원들이 몰려있다. 이곳에는 한때 대입 학원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각종 국가시험을 준비하는 학원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학원마다 수험생들로 만원이다. 이곳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 그대로 콩나물 시루 같다.

몇몇 강의실은 책 한 권 놓을 자리만 있으면 비집고 앉아 강의를 경청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학생 중에서도 중년 나이로 보이는 수험생들이 적지 않다. 그중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 먹은 사람들이 강의실 맨 앞쪽에 몰려 있다. 이곳의 고시학원 관계자는 “200~300명이 가득 차는 강의실에는 9시에 수업이 시작되는데도 7시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중·장년층 수험생들은 특히 열정이 높아 개별 상담을 요청하는 분도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곳에서 세무직 시험을 준비하는 김성균(가명·34) 씨는 “나이가 많은 분들이 몇 년 새 부쩍 늘었다”고 설명했다. 40~50대 9급 공무원 응시생들의 폭발적 증가는 우리사회의 몇 가지 변화와 겹치는 현상이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업계에 불어닥친 구조조정 광풍과 2009년 공무원시험 연령제한 폐지가 맞물린 결과다.

공무원 시험에서 연령제한 폐지는 파격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1963년 이후 5·7급 공채시험의 상한 연령을 28세, 9급 공채시험은 32세의 제한을 뒀다(하한 연령은 각각 20세, 18세였다). 그러다 2008년 국회에서는 행정·외무고시, 7·9급 등 모든 국가공무원 공개채용 시험에서 응시연령 상한을 완전히 폐지하는 ‘공무원임용시험령(대통령령)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류임철 안전행정부 인사기획실 과장은 “취업기회를 확대하고 채용차별을 없애기 위한 일환으로 생겨난 제도”라고 설명했다.

당시 우리 사회의 분위기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대부분의 기업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갈수록 좁아지는 기업들의 취업관문과 비정규직의 확산, 조기 퇴직의 불안감이 팽배하던 시기다. 1997년 외환위기만큼이나 세계적으로도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상황이었다.

대기업 명예퇴직 후 지난해 우정사업본부 7급 공채시험에 합격한 김웅렬(52) 씨. 옛 직장에서 맞은 위기의식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위기가 새로운 인생의 반전을 선사했다

국내 굴지의 통신회사를 다니면서 남부럽지 않던 직장생활을 꾸려온 김웅렬(52) 씨도 이때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2009년 회사가 명예퇴직 신청을 받자 고민 끝에 퇴직신청서를 썼다.

당시 48세로 정년을 10년여 남긴 상태였지만 그는 ‘쫓겨나기보다 내 발로 걸어나가자’고 결심하고 22년 동안 몸담았던 일터를 떠났다. 퇴직 후 그는 새로운 인생에 도전했다.

직장 업무와 관련된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로 아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씨는 “옛 직장의 본사 건물에 바로 붙어있던 우체국이 새로운 일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해 우정사업본부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51세 나이에 공직 생활에 첫발을 내디뎠다. 현재 그는 서초우체국 소포실에서 국내외 운송 및 택배 관련 서무를 맡고 있다.

공무원 제도의 연령제한 폐지는 중년들에겐 새로운 기회를 선물했다. 공무원 수험생인 이용택(가명·52) 씨는 건설회사를 퇴직한 후 새 일자리를 찾다가 아예 국가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씨는 “회사를 나온 뒤 이곳 저곳 이력서를 꽤 넣어봤는데 재취업이 쉽지 않았다”며 “적지 않은 나이에 도전 할 수 있는 일이 공무원이라고 판단해 결심했다”고 말했다.

물론 40~50대에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합격자에 비해 탈락자가 훨씬 많을뿐더러 합격하더라도 일할 기간은 10년 남짓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좁은 문을 향해 달려가는 걸까?

그동안 자신이 일했던 분야와 업무 연관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듯하다. 몇 년 전까지 통신회사에 근무했던 최동인(55)씨는 자신이 맡아왔던 유선통신 관련 업무와 유사한 방송통신직렬로 9급 공무원 직에 응시했다. 그는 1년 반 만에 시험에 합격해 미래창조과학부 국립전파연구원에서 일하게 됐다.

그는 “회사에 퇴직신청서를 내기 이틀 전에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렸는데 아내가 큰 충격을 받았다”며 “하지만 새로운 도전 의사를 밝히자 ‘잘 해보시라’고 격려해줘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전시청의 이웅태 씨도 행정직 9급에 합격했지만 언론사 경력을 인정받아 언론·홍보 유관부서인 공보관실에 배치돼 자신의 ‘전공분야’를 살릴 수 있게 됐다.

“절박한 상황이 새로운 기회를 줬다”고 말하는 이도 많다. 관세청에서 9급 공무원으로 일하는 박요한(54) 씨가 그런 경우다. 그는 한때 대기업에서 일하다 40대 초반 나이에 퇴직해 여러 가지 일터를 전전했다.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6년여 동안 일했고, 3년여 동안은 택배회사에서 배달 일도 했다. 그는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물불 안 가리고 일했지만, 아이들이 아빠가 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가 50세가 넘어갈 즈음에 그는 건강까지 나빠져 폐렴 질환을 앓게 됐다. 몸이 나빠지고 우울증까지 찾아올 찰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박씨는 “아내가 어느 날 공무원시험 연령제한이 폐지됐다는 뉴스가 나왔다며 저한테 넌지시 시험을 쳐보라고 권해 힘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7급 관세직에 응시했고 1년 반의 노력 끝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는 현재 인천세관에서 수입신고 이전 단계인 보세 화물 관리를 맡아 일하고 있다.

오랫동안 쌓은 경험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에 보태고자 나선 사람도 있다. 대전시청의 이웅태 씨는 사실 한두달 간격으로 국가직(고용노동부)과 지방직(대전시) 공무원에 연달아 합격했지만 고향인 대전시에서 지방공무원을 자처했다. 애당초 그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오랜 꿈 때문이었다.

“높은 곳에 있으면 멀리, 큰 그림을 볼 수 있지만 낮은 곳에 있으면 구체적으로 잘 볼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씨는 서울 자택에서 통근할 수 있는 거리를 포기하고 주말부부라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전시 발령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의욕과 다른 머리, 계속되는 가시밭길

중·장년의 나이에 새로운 길을 찾아나선 이들에게는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도 많았다. 나이 오십이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머리도 굳고 눈도 침침해진다”는 말을 곧잘 한다. 열정과 의욕은 남아있는데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공부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마련이다.

공무원 시험의 평균 경쟁률은 80대 1, 합격자 평균점수도 79.8~85.5점이나 된다. 고시학원 관계자들은 “9급이든 7급이든 보통 1~3년 정도 공부해야 1% 합격선에 들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공무원 시험 응시자들은 평균 연령 29.1세로 중년들은 팔팔한 젊은이들과 경쟁해야 한다.

미래창조과학부의 최동인 씨는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머리가 굳어서인지 어제 밑줄을 그으면서 공부했는데 다음 날 읽었을 때는 다른 사람이 밑줄을 그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그는 덧붙였다. 대전시청의 이웅태 씨도 “문제를 풀 때마다 예전과 다르다고 느꼈다. 순발력에서 차이가 났다”고 설명했다.

중년의 수험생들은 비용 투자에도 비교적 인색한 편이다. 학원에 직접 가기보다 ‘숨어서’ 공부하는 수험생이 더 많다는 말이다. 노량진 입시학원 관계자에 따르면 “학원에서 공부하는 나이 많은 응시자는 100명의 2명 꼴로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직접 만난 공무원 시험 합격자들도 학원보다는 독학에 기댄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비싼 수강료 때문”이라고 말한다. 직접 입시학원을 다니게 되면 두 달 과정이 60만원 선을 상회한다.

이에 비해 인터넷 강의를 듣게 되면 3개월 과정이 과목당 5만~10만원이 든다.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 중·장년층 국가시험 수험생들은 웬만하면 인터넷 강의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최동인 씨는 “학교 다니는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교육비 부담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나 자신을 위해 선뜻 큰돈을 쓰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시험 준비 비용을 대부분 실업급여로 충당했다”고 덧붙였다. 그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1년 반 동안 들인 돈은 식비를 제외하고 300만원을 밑돌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 해도 한 번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노량진 고시학원 관계자는 “보통 공무원 시험은 최소 1년 반에서 3년의 기간을 버텨야 한다”고 말했다. ‘궤도에 오르기까지’의 시간이 꽤 걸린다는 말이다. 7급 합격자 김웅렬 씨는 첫 해 9급 공무원 필기합격 후 면접에서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그가 시험에 합격하기까지는 꼬박 2년 반이 걸렸다. 김씨는 “‘1년이면 되겠어?’라며 믿어줬던 아내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돌이키며 말했다.

중년에 신참 공무원이 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미련할 정도로 끈질기게 공부했다”고 말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만큼이나 규칙적인 일과를 계속한다.

관세청의 박요한 씨는 수험생 시절 아침 7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출근하는 아내를 배웅하고 집 청소를 마친 뒤 9시쯤 공공도서관으로 매일 출근했다. 저녁 7시까지 공부한 뒤 밤에는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따로 요가를 배우기도 했다. 하루 10시간 넘게 책을 붙들고 싸우려면 체력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전화기를 꺼놓고 한동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기도 한다.

중년의 나이는 하루 중 오후 3시와도 같다. 하지만 가까워지는 은퇴 시기는 갈무리가 아닌, 인생 2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도 한다.

경제적 도움보다 심리적 안정감이 우선

이들이 긴 수험 기간을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은 역시 가족에서 나온 듯하다. 최동인 씨가 회사를 퇴직할 무렵 딸의 나이는 스물 셋이었다. 현재 초등학교 교사인 맏딸은 그때 마침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었다. 최씨는 “딸에게 힘을 주기 위해 더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었다”며 “합격한 뒤에 딸이 ‘도전하는 아빠 모습이 자랑스러웠다’고 해줘서 마음이 더욱 뿌듯했다”고 말했다.

이웅태 씨는 “군입대를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는 아들과 한 약속을 지키려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에게 힘을 보태주기 위해 “아빠가 먼저 해볼게”라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게 돼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공무원의 정년은 60세다. 나이 오십 줄에 새 출발을 하는 중년의 초급 공무원들에게는 일할 수 있는 기간이 10년 남짓 남아있을 뿐이다. 이 짧은 시간을 위해 그들은 2~3년을 투자한 셈이다. 힘겨운 도전에서 결실을 얻어 인생 제2막을 열어젖힌 이들에게는 어떤 보상이 주어졌을까?

그들은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삶”을 되찾게 됐다고 입을 모은다. 공무원의 안정된 업무 환경도 큰 만족감을 주는 듯하다. 최웅인씨는 “회사에서 상품을 직접 판매하면서 영업실적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정부기관에서 국민을 위한 대민 서비스 활동을 하다 보니 성취감이 더 높다”고 말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시간적인 여유도 많아졌다. 최동인 씨는 퇴근 후 항상 집에서 가까운 등산로를 걸으면서 운동한다. 야근을 밥 먹듯이 했던 회사원 시절에는 꿈도 못 꿔본 일이다. 밤낮없이 불규칙한 삶을 살았던 기자 출신의 이웅태 씨도 “주말에 아내와 쇼핑하고, 영화도 보고 등산도 함께 한다”며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 가장 좋다”고 말했다.

경제적인 혜택은 어떨까? 공무원 퇴직연금은 20년 이상 근무한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언감생심이지만 ‘공적연금 연계제도’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2009년 8월 도입된 공적연금연계제도는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의 가입 기간을 채우지 못한 경우 두 연금 간 가입기간을 합쳐 20년이 넘을 경우 60세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이들의 사례에서 보듯 중년 나이에 되찾은 안정적인 삶의 전제조건은 경제적인 요인보다는 신분 안정과 자기계발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 등으로 얻는 것이 많은 듯하다. 하정화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중년 나이에 새로운 일터를 얻은 이들이 되찾은 것은 노후연금으로 얻는 경제적인 안정보다 신분보장과 명예 등 정서적 안정감이 더 클 수 있다”고 분석했다.

100세 시대에 맞은 오십은 마라톤으로 치자면 인생의 반환점을 막 도는 나이다. 과거에는 자신의 삶을 갈무리하는 나이로 치부됐지만 요즘은 인생의 가지 않은 길을 모색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됐다.

박지현 월간중앙 인턴기자

온라인 중앙일보·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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