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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바나나 그늘의 공포…원주민의 투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서울이 있는 비틸레부 섬엔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높은 산이 있다. 이 산으로 가기 위하여 달리고 있는데 도중 인도인의 집이며 피지 원주민마을이 보이기도 한다. 한결같이 밀폐형의 초가집들이다. 인도인은 거의 독립하여 상지만 피지 원주민은 집단부락을 이루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낯선 동양인이라고 유심히들 쳐다본다. 미소를 던지니 그들도 함께 좋은 낯을 보여준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카메라와 삼각, 그리고 아침 그 원주민 부부가 싸준 도시락뿐이어서 매우 가벼운 차림으로 오솔길을 더듬으며 자연풍경을 감상했다.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는지 몹시 시장했다. 그래서 바나나 나무가 있는 그늘아래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저 만치서 시커먼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며 꿱꿱 소리를 쳤다. 그 전에 원주민 말을 배워두긴 했으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벌떡 일어나 살펴보니 그 사람은 긴 창 같은 것을 들고 이쪽으로 뛰어 오고 있다. 죽이려고 하는 기세여서 가슴이 섬뜩했다.
무르익은 노르끄레한 바나나에는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그는 혹 이 바나나 나무의 임자로서 내가 따먹고 있지 않나 하고 저렇게 골을 내며 오는 것일까. 그가 원시적인 모습이고 보니 의사소통이 될리 없어 적이 불안했다. 지금은 비록 식인풍속이 없어지긴 했으나 사람을 죽이는 일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큰일을 치를 것 같아서 나의 유일의 무기인 카메라 삼각을 길게 뽑아서 그러쥐었다.
근처에 마을이 있으면 위급할 때 피신을 할 수 있으련만 동네가 멀고 보니 그럴 수도 없다. 그런데 나를 막 죽일듯하여 쏜살같이 달려오던 그가 약40여m 앞에서 갑자기 멈춰섰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삼각을 꺼낼 때 강렬한 햇빛에 번뜩여서 혹 무서운 무기를 내가 가진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더 달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큰 소리로 무어라고 자꾸만 지껄였다.
그러나 아무런 대꾸도 못하니 그는 창을 내게 던지려다 말고 땅에서 돌을 줍더니 던졌다. 화살이 아니니 그리 무섭지는 않지만 그가 던진 돌이 어찌나 빠르고 센지 윙하며 소리를 내고 귓가를 스쳤다. 다비드 왕이 소년 때 돌팔매질로 거인 골리아드의 머리를 꿰뚫었다고 하듯이 그가 던지는 돌은 탄구과도 같이 빠르며 맞았다가는 영락없이 머리가 뚫릴 것만 같았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다비드가 문제가 아닐 정도로 돌을 던지는 그의 모습이 늠름했다.
이 돌이 무섭다고 납작하게 엎딘다든지 하면 도리어 약점이 되겠기에 똑바로 보면서 돌의 방향에만 정신을 차렸다. 그러면서 그가 과히 더 골내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나아갔다.
그가 혹 뒤를 돌아보며 자기 동료를 부르든지 하면 더 겁날 일이지만 다행히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나는 햇빛에 반사하도록 삼각을 움직이면서 비장한 각오로 자꾸만 다가갔다. 이것은 물론 그와 격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으면 그가 언제까지나 돌을 던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소리를 치며 저렇게 속사포처럼 잇달아 던지니 아무리 잘 피하더라도 그 중 한 돌에 맞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가 더 가까이 못 오는 것으로 보아 내가 조금씩 앞으로 다가서면 그가 달아날 것이라는 심리전을 쓰기로 독단을 내린 것이다. 이 도리밖에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돈·키호데는 종사 산초·판다가 있어서 큰 도움을 받지만 나는 홀로 다니자니 이런 때를 당하면 혼자서 판정을 내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세 차례 여행에서 이런 봉변을 여러 번 당하긴 했지만 저항을 하지 않고 용케도 위기를 모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무저항 주의적인 방법을 쓰기로 한 것이다.
나는 마치 고릴라의 걸음걸이와도 같이 뚜벅뚜벅 한 발짝씩 다가서면서도 그를 윽박 지르기 위하여 이리오라고 손짓을 했다. 꽤 가까워졌을 때 그는 돌을 던질 새가 없는지 가지고 있던 창을 냅다 던졌다. 살짝 피하자 그 창은 아슬아슬하게도 옆을 스쳐서 땅에 박혔다.
나는 그 창을 뽑아서 딴 방향으로 던져버리고는 역시 내게로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며 앞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그는 그제서야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부리나케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닌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는 무저항주의의 승리랄까, 혼자생각으로 잘했다고 느꼈다. 그러나 나중에 뒤따라오거나 아니면 많은 원주민을 데리고 올지도 몰라 연상 뒤를 돌아보며 뛰다시피 돌아가자니 땀이 비오듯했다. [김찬삼 여행기(피지군도에서 제6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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