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5)대전의 25시(1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딘 장군의 피체(3)>
딘 장군이 36일 동안 적지를 헤매는 동안 밥을 주거나 길을 가르쳐 주면서 장군을 도와준 한국 사람들은 모두 6명이었다. 공산 치하에서 미군을 돕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기록을 보면 딘 소장이 36일 동안에 밥이라는 것을 먹어본 것은 모두 12회뿐이었다.
그럼, 이제 딘 소장을 도와준 6명의 한국인 중에서도 가장 그를 따뜻이 대해주며 4일간 숨겨준 한 농부의 회고담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박종구씨(당시 전북 무주군 절상면 방이리 고방마을 거주·현 주소도 동일·농업·59·주=전주 주재 고광준 기자회견) 『음력으로 7월7일(8월20일) 아침 5시쯤 지게를 지고 밭일을 하러 나갔는데 웬 키큰 사람이 산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와요. 그리고는 이내 쓰러졌는데 가보니까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예오. 몸집과 얼굴 등을 보아서 미군이란걸 알았읍니다.

<시계 미화 등 다 가지라고>
나는 손짓으로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집으로 데리고 왔읍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같이 앉았는데 서로 말이 통해야지요. 그 사람이 손으로 자꾸 배를 가리키기에 배가 고픈게로구나 생각하고 집사람을 시켜 밥 한사발과 김치를 갖다 주었더니 미친 듯이 퍼먹어요. 그런데 얼마 안있다가 모두 토해버려요. 식성이 안 맞아서 그런가 싶어 마침 남아있던 제사 음식인 식혜(감주)를 떠다 주었더니 이건 잘 먹어요. 그리고는 좀 정신을 차리더군요.
한참 있다가 우리 집이 외딴집이지만 마당에 있으면, 남의 눈에 띌까싶어 뒤채의 골방으로 안내했지요.
방에 들어오더니 시계·안경과 미국돈 2백불을 내놓으면서 나더러 다 가지라고 해요 그래서 나는 한국 은행권 1백원짜리를 꺼내 보이면서 이것 아니면 쓸 수 없다는 것을 손짓으로 시늉하자 그는 대구에 가면 그런 돈은 산더미처럼 있다고 손을 벌려 보여요. 그리고는 무슨 종이 쪽지를 내놓기에 본즉 대전, 금산, 무주만이 표시되어 있고 대구 방면쪽은 찢어져 없었지만 계속 대구 대구 하기에 그쪽으로 가는 길을 묻는 줄 짐작은 했읍니다.

<닭 한 마리 잡아 대접하고>
그날 저녁에 닭을 한 마리 잡아 대접을 했더니 아주 맛있게 먹더군요 밤에 함께 잠자리에 들 때 허벅다리에 찬 권총을 풀어서 머리맡에 놓아요.
총알이 셋 있기에 한 알만 달라고 했더니 그는 자기 목을 가리키며 죽는 시늉을 해요. 그래서 최악의 경우 자살하려나보다고 눈치챘습니다. (딘 소장 수기에는 실탄 12발로 돼있음) 이렇게 해서 그분은 우리집에서 4일간을 묵었지요. 물론 미군 장군이란 것은 그때는 몰랐구요. 인기척이 나면 거적을 씌워 감추곤 했지요. 출발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더 묵어가라고 시늉을 했으나 굳이 가려고 하기에 주먹밥 3개, 옥수수 10개 호두 30개를 싸주고 집사람과 함께 한 1㎞쯤 떨어진 무주군 부남면 장안리로 가는 길목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우리부부는 그와 헤어질 때까지 OK, OK 하면서 수10번 악수를 했는데 나중에는 서로 눈물까지 흘렸지요

<63년 딘 아들 사례방문>
다음날 아침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뒷산 생이봉에 올라가 보았더니 역시 멀리 못가고 숲 속에 숨어 있어요. 처음에는 권총을 빼들고 노려보았지만 내가 웃자 그도 반색을 하며 손을 잡더군요. 둘이 하루종일 숲 속에서 지내다가 그날 밤 7시께 삼유리 앞길까지 안내해 주고 다시 헤어졌읍니다. 63년 9월께 딘 장군 아들이라는 미공군 중위가 우리 집을 찾아와서 내가 그때 장군과 처음 만났던 밭둑에 전나무 두 그루를 기념으로 심었습니다. 한 그루는 그 후 죽었지만 다른 한 그루는 지금도 자라 자라고 있지요. 그리고 차고있던 팔목시계를 선물로 주더군요
그때 장군이 진안군 상전면에서 잡히지 않고 대구까지 무사히 갔어야 하는 건데.』
딘 장군의 수기인 『죽음의 생활 3년』에도 박종구씨 집에서 신세진 이야기가 비교적 소상히 기록돼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야기가 큰 줄거리는 같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좀 상치되는 점도 있다. 장군 수기에는 이 대목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8월19일에 나는 동네에서 동떨어진 산 속에 있는 빈집을 발견하고 그 속에 들어가 누워 잠을 잤다. 그 다음날 아침 내가 잠을 깨게 된 것은 한 남자가 개집아이를 업고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딘 수기·농부 증언 약간 달라>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달려가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애원했더니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의 가족은 남동생 세명과 부인, 처남 그리고 두 서너명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밥과 돼지고기를 뒷마당에서 들고 나왔다.
그것을 단숨에 먹고 난 후 손짓을 해가며 여기서 나흘만 머무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4일만 푹 쉬고 무엇을 좀 먹으면 기력이 회복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집 사람은 나를 집 뒤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 그 방에 들어가 보니 파리가 들끓어서 파리와 싸우다가 단 5분도 못되어 밖으로 나왔다. 순간 아까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버렸다.
이날이 바로 8월20일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먹을 것에 손을 댄 것이 15일이 아니면 16일이었을 것이다. 그 동안에 내가 입에 댄 것이라고는 산딸기 백개쯤에다, 썩어 문드러진 감자 몇 알뿐이었다. 4, 5일 만에 처음으로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 본 것이다. 점심때 밥과 김치를 먹었지만 그것도 또 토하고 말았다.

<5일 만에 먹은 밥 다 토해>
내가 손짓해가며 계란이 먹고싶다고 하였더니 그들은 이것을 잘못 알아듣고 닭 한 마리를 잡아왔다. 그 닭국맛이란 그렇게도 좋을 리가 없었다. 이것은 토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에는 구운 옥수수와 감자로 세끼를 때웠다.
내가 그 집에 온지 첫날부터 왜 그런지 둘째 동생이 나를 반가이 대하지 않고 경계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한국말과 손짓으로 여러번 인민군이란 말을 했고 내가 인민군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을 표현했을 때 사뭇 놀라는 눈치였다. 아마 그는 그때까지도 나를 소련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다음날 두 형제는 한 늙은이를 모셔다 나를 보여주었다. 아마 그들이 내 문제를 가지고 충고를 받고자 데리고 온 할아버지가 아니면 선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은 좋은 결과를 초래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그 둘째 동생에게 시계와 만년필을 주었고 그 형에게는 돈지갑을 주었다.

<시계 만년필 주며 동생 달래>
이렇게 좀 불안한 생각을 가지면서도 며칠 그 집에 묵었는데 어느날 밤이 되자 그 형이 나에게 와서 여기를 떠나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보였다. 물론 나는 그 집 사람들이 공산군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서워서 그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나를 해칠 생각이 있다면 얼마든지 공산군에게 밀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네개의 찐 옥수수와 밥을 보자기에 싸 주었다. 그리고는 약 반 마일 가량 바래다주기까지 했다.
그날 밤은 어두컴컴하였다. 나는 구덩이에 발을 헛디뎌 앞으로 거꾸러졌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너무 맥이 풀려서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일시에 몰려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곧장 숲속으로 들어가서 잠을 잤다. 이것은 내가 사기를 잃었다기 보다는 매우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기어이 우군 전선까지 뚫고 가겠다는 결심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아까 그 사람과 헤어질 때 그는 나를 몹시 동정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표정이었다. 당신도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기어이 목적을 달성해서 당신을 놀라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포키트에 썩은 배 따 넣어>
다음날 아침, 어떻게 해서 숲 속에서 그 사람을 또 만났다. 그는 나를 보더니 반 마일 가량 떨어져 걸으면서 신작로까지 약 10마일을 또 배웅해 주었다.
그와 헤어져 혼자 걷고 있으려니까 좀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쳐다보았더니 아이들이 불탄 집 옆에 있는 배나무에서 배를 따고 있었다. 애들은 좋은 배를 모두 따 가지고 가버렸다.
그들이 간 후, 나는 나머지 문드러지고 설익은 찌꺼기 배를 따서 호주머니 속에 가득 집어넣었다. 여하간 배라는 것은 먹는 것이니까, 썩고 익고간에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이상과 같이 딘 장군 수기와 박종구씨의 증언 내용은 약간 차이가 있다. 그러나 딘 장군이 박씨 집에서 제일 신세를 지고 후대를 받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여하간 인심과 용기가 아니고서는 그 당시 미군을 감싸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36일 동안에 딘 장군이 육류를 입에 댄 것도 박씨 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딘 소장이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일부러 그의 아들을 시켜 박종구씨 일가를 방문케하고, 기념식수까지 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알림=본 연재 77회(9월25일)부터는 『국군의 전선정비』라는 제목으로 진천·청주·충주·음성·보은·상주·연풍 지구 등 전투를 다룰 계획이오니, 관계인사 제위께서 참고될만한 의견이나 제언이 있으시면 곧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연락처=중앙일보사 편집국 민족의 증언 담당자 앞. 전화(28)8211(교환)의 55번, 야간은(93)2250, 지방은 중앙일보 각 지사·지국에 연락해도 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