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두식<서울대물리대학원·독문학>|「에른스트·크로이더」저『지붕 밑의 무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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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올해 65세가 된 노 작가이지만 우리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서독의 소설가「크로이더」전후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현대소설에서 흔히 느끼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어리둥절하게 된다. 다른 의미란 그 내용이나 소설기법이 난삽하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스터리를 읽는 것과 같이 흥미진진하게 읽어갈 수가 있기는 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무엇을 쓴 것인지 판단에 궁해서 어리둥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크로이더」의 소설의 세계는,「카프카」의 소설도 그렇지만 환상의 세계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서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 다만 그 현실이 단순한 현실의 묘사가 아니라 작가가 제멋대로 희롱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문학이란 현재의 평범한 거울이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한 시대의 마술적인 유희』라고「장·파울」이란 18세기 독일작가가 말했는데, 「크로이더」는 바로 이런 소설의 범주를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한 시대라는 말일 것이다.
작가가 살고 있는 현실이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한 시대, 즉 작가의 눈에 비친 이상적인 시대거나 혹은 바람직한 시대를「크로이더」는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현실의 부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크로이더」는 그런 식으로 현재를 부정하고 독일의 전후의 공포시대, 잔인한 시대, 처참한 시대를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크로이더」는 자기의 소설을 통해서 현실의 고뇌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고 구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현실의 가혹과 잔인과 처 참을 통렬히 비만하고 있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문제를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런 부담도 없이 담담하게 끝까지 읽어보아야 한다. 또 사실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것이 그의 소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읽고 나서 우리는 의문에 싸이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일견 황당무계한 비밀결사는 도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린이들의 소꿉질과 같은 그 지붕 밑에서 생활하는 무리들의 행동, 마치 중세기의 설화와 같은 보물찾기 경쟁 따위의 얘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적으로 말해서 그의 소설은 독일·낭만주의 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문학이라는 점을 알게되면 우리는 쉽사리 이해하게된다.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이 소설의 이상적 경지라고 생각했던 동화의 세계를「크로이더」는 현대적으로 실현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크로이더」는 이런 시적인 동화의 세계를 통해서 현대인간의 낭만을 잃은「납덩이」같은 일상생활과 환상을 잃은 무 감흥 적인 태도와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물질 문명에 마비된 현실과 투쟁을 벌이는 정신적인 결사가 바로『지붕 밑의 무리들』이며 주체성을 잃은 현대인간의 자기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그들 주인공의 행동이라고 보겠다. 그리하여 현대인간이 상실한 물질과 정신의 조화된 세계야말로 그들이 갈망하여 찾아 헤매는 세계이며 이것이 제3망에 나오는 어떤 신에 대한 기도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민중서관 간『오늘의 세계문학』「크로이더」편·박종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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