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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예언자 라잔, 벼랑 끝 인도경제 구원자 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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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4일 오전 11시(현지시간) 인도 뭄바이 시내에 위치한 인도 중앙은행(RBI) 정문. 라구람 라잔(50) 신임 총재가 4명 부총재의 환영을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두 시간 전부터 진을 치고 몰려 있던 취재진 때문에 그의 얼굴은 카메라 조명으로 끊임없이 번쩍였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라잔 신임 총재는 지난해 10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기고문에 “중앙은행 총재는 록스타와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썼다. 하지만 지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화려한 무대가 아니다. 외환위기를 막으며 통화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경제전쟁의 포성이다.

 ‘인도 경제를 구하라’. 이날 인도 중앙은행 총재로 공식 취임한 그에게 떨어진 임무다. 인도 루피화 가치는 달러당 67루피에 도달해 심리적 마지노선인 70루피를 눈앞에 두고 있다. 최근 6개월 새 20% 가까이 떨어졌다. 라잔 총재가 과연 1991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상황에 빠진 인도 경제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통화가치 추락 … 외환보유 총탄도 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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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인도 경제지인 비즈니스 스탠더드와 지난 2일 한 인터뷰에서 “인도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 가는 일은 절대 없다”며 “우리는 충분한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91년과 같은 외환위기는 없을 것이란 선언이었다. 당시 인도의 외환보유액은 12억 달러(약 1조3000억원)로 바닥났다. 인도는 IMF에 손을 벌려야 했다.

 라잔 총재의 말처럼 지금 인도의 외환보유액은 아직 위험 수준은 아니다. 올 8월 기준 2504억 달러로 세계 10위권이다. 수입액 기준으로 6개월치에 해당한다. 라잔 총재는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부정했을 뿐 경제 전반의 어려움에 대해선 말끝을 흐렸다. “현 경제 상황은 불안정하다. 가까운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다”라고 했다.

 라잔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3년 전 정확히 예측했던 스타 경제학자다. 2005년 세계 중앙은행 연찬회(잭슨홀 미팅)에서 금융위기를 예견하며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에 대응을 촉구했다. 경제 이론으로 위기를 예측했던 그이지만 현실의 위기를 수습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인도의 올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4.4%로 뚝 떨어졌다. 정부가 목표로 하고 얼마 전까지 실제 유지했던 성장률은 8~9%다. 현재 인도는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수지 적자가 나란히 GDP의 5% 선까지 불어났다. 국가부채는 하루가 다르게 쌓이고 있다.

“모든 경제 위기는 정치 요인서 비롯”

 라잔 총재와 친구이기도 한 인도계 수마 차크라바티 유럽개발부흥은행(EBRD) 총재는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도가 8~9%에 크게 못 미치는 성장을 하게 된 것은 구조 개혁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라잔이 인도 경제를 구하기 위해선 통화정책만으론 부족하며 어떻게든 개혁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인도 경제가 벼랑 끝에 서게 된 근본 원인과 해법은 라잔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가 2010년 출간해 이름을 떨치게 한 저서 『폴트 라인(Fault line)』에도 그 내용이 다 나와 있다. 그는 책에서 “거의 모든 경제위기는 정치적 요인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경제위기는 소득 불평등에 뿌리를 둔다. 강력한 정치적 힘이 뒷받침된 개혁이 있어야 경제의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작 그는 개혁을 이끌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인물이다. 라잔은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 경제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최연소 IMF 수석이코노미스트 자리에 올랐고,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2011년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가 인도에 돌아와 통화정책의 수장이 된 것은 26년 만이다. 인도 재무부의 수석경제자문역을 맡았던 경력이 있지만 정·관계와 금융시장 인맥은 두텁지 않다.

26년 만에 고국에 … 영향력 적어 한계

 지금 인도는 개혁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인도 의회는 지난 2일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식품 보조금 법안을 통과시켰다. 재정적자를 악화시킬 포퓰리즘(인기영합) 정책 성격이 짙다. “소득 불평등 때문에 심해진 불만을 회피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도입한 대책들이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며 그가 책에서 예견한 대로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IGE) 이사장은 “중앙은행 총재로서 직접 행사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은 한정돼 있다. 실제 요구되는 주요 역량은 정치권과 시장을 향한 설득의 리더십이란 점에서 그의 앞길이 험해 보인다”고 말했다.

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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