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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권석천의 시시각각

무기여, 잘 있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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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20세기 초 미국 연방 대법관이었던 올리버 W 홈즈는 이렇게 말했다. 법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험한 행위를 삼가도록 강제하는 데 있지, 악한 경향에 기울어지는 것을 제지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그의 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내란음모·선동,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다. 이 의원은 회피 전략을 구사하는 듯하다. 자신은 “뼛속까지 평화주의자”며 녹취록은 “날조·왜곡됐다”면서도 계속 말을 바꿔가며 구체적인 내용엔 함구한다. 이제 우리가 빠뜨리지 말아야 할 포인트를 짚어보자.

 우선 피의자 이석기와 국회의원 이석기는 구분돼야 한다. 피의자 이석기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건 수사 받는 자의 권리다. 국회의원 이석기는 다르다. 그는 국민 앞에서 선서했다. “헌법을 준수하고…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따라서 그는 어떤 맥락에서 “철탑 파괴”와 “국회 교두보” 얘기를 했는지 구체적이고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묵비권 뒤에 서고자 한다면 국회의원 배지부터 반납해야 한다.

 사상의 자유와 팩트(사실)의 확인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의원의 내심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에게 ‘김정일을 욕해 보라’고 하자”는 주장도 나오지만 그건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매카시즘이 나쁜 건 증언대에 세워놓고 내심을 밝히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130여 명 앞에서 했던 발언들은 사상의 자유로 보호받을 수 없다. 그는 우리에게 팩트를 설명할 의무가 있다.

 이런 ‘가려서 보기’가 왜 필요할까. 국정원이 밝힌 이 의원 혐의가 사실이라면 민주주의와 헌법을 흔들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유·무죄를 가리는 과정도 철저히 헌법이 정한 원칙과 절차에 따라야 한다. 그러니 흥분하지 말고 팩트만 따라가자. 팩트가 보여주는 대로 판단하면 된다.

 국정원의 자세도 다르지 않아야 한다. 만약 국정원이 과도하게 정치적 의미를 덧붙이거나 색깔 시비로 전선을 넓히려 한다면 명백한 오프사이드(off-side)다. ‘이석기 내란음모’를 이유로 국정원 댓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면 그것 역시 반칙이다.

 “이래서 심리전이 필요한 것 아니냐”고? 국정원이 이 의원의 서울 합정동 회합을 포착할 수 있었던 건 심리전과 관련 없는 내부자 제보 덕이었다. ‘원세훈 원장 지시·강조 말씀’의 문제점은 정부에 비판적인 진보세력을 ‘종북’으로 뭉뚱그린 데 있다. 이 의원이 자신을 향한 수사를 “진보·민주세력 탄압”으로 규정한 것에 견주어보면 놀랄 만큼 닮은꼴 아닌가.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간 한국 사회는 이슈가 바뀔 때마다 이리 쏠리고 저리 몰렸다. 큰 사건 하나만 터지면 금세 ‘보수냐, 진보냐’로 원대복귀했다. 그 단세포적 사고가 ‘숲 속의 참치’ 댓글과 “압력밥솥 폭탄” 발언을 낳았고, 지금도 한물간 옛 구도로의 회귀를 재촉하고 있다.

 이번만큼은 사회를 이전 시점으로 되돌려 놓는 ‘시스템 복원’ 키를 누르지 말기 바란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사실과 거짓을 가리고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면 열린 사회의 적(敵)이 누군지 드러날 것이다. 그런 작은 각성들이 모일 때 우린 한발 더 내디딜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처럼 “우리는 쉴 새 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착오적 망상(妄想)들은? 1984에든, 1Q84에든 남기고 가는 수밖에. 가수 박상민은 노래했다. 마마보이, 플레이보이, 양다리에 지친 한 여자가 이 한마디 남겨놓고 아주 멀리 떠나갔다고. 우리도 나지막하게 내뱉어보자. “무기들아, 잘 있으라”고.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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