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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령 옛길→자전거대회 코스, 폐탄광→미술관 … 추억을 팝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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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호 14면

지난달 미시령 옛길에서 열린 ‘2013 도루묵 힐클라임 대회’에 참가한 자전거 동호인들의 모습. 사 [진 강원도청]

미시령 옛길. 강원도 영서 지역인 고성군 토성면과 영동 지역인 인제군 북면을 잇는 도로다. 인제의 백담사, 고성의 청간정을 품고 있어 과거엔 이 도로 자체가 관광 코스로 여겨졌다. 하지만 2006년 미시령 터널이 들어서면서 찾는 이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성수기 주말에도 이 길을 지나는 자동차는 하루 평균 1000대가 채 안 된다. 인근 상인들도 울상이 됐다.

과거에서 돈맥(脈) 캐는 지자체들

외로운 신세에 놓였던 미시령 옛길에 지난달 20일 800대 넘는 자전거가 몰렸다. 이 길 위에서 ‘2013 미시령 도루묵 힐클라임 대회’가 열리자 전국의 자전거 동호인들이 모여든 것이다. 대회는 인제군 용대리~고성군 미시령 정상(해발 826m) 간 10여㎞ 구간에서 치러졌다. 최고령 참가자 최수남(81)씨는 “예전엔 구불구불한 이 길을 자동차로 넘곤 했는데, 젊어서 보던 경치를 자전거를 타면서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강원도는 이 대회를 시작으로 도내에 산재한 옛 도로를 활용한 자전거 대회를 지속적으로 열 계획이다. 강원도 문화관광체육국장으로 대회를 주도했던 최광철(58) 원주시 부시장은 “강원도가 이제 옛길과 임도(林道)를 활용해 사계절 내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레저천국으로 변신하게 될 것”이라며 웃었다.

옛것으로만 여겨져 외면해 왔던 지역 고유의 문화·자연 자원을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늘고 있다.

‘옛것’ 특유의 추억과 스토리가 담겨 있어 방문자에게 다양한 얘깃거리를 들려줄 수 있는 데다 오랜 기간 쌓여온 지명도까지 있어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과거의 건물과 시설들을 복원해 활용하는 만큼 조상 대대로의 유산을 지킨다는 점도 매력이다.

해외에서도 과거를 활용해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곳이 있다.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대표적이다. 2000년 템스 강변의 화력 발전소를 세계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 갤러리로 탈바꿈시켰다. 지난해에만 530만 명이 다녀가 전 세계 박물관과 미술관 중 4위의 방문객 수를 자랑하는 명소가 됐다. 독일 에센 지역의 졸페라인 뮤지엄도 폐탄광을 문화공간으로 바꿔 재미를 본 사례다.

오랫동안 쌓아온 지명도로 친근
국내에도 폐탄광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바꾼 곳이 있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의 ‘삼탄아트마인’이 그곳이다. ‘삼탄아트마인’은 1964년부터 2001년까지 운영된 삼척탄좌(Samtan)에다 예술(Art)ㆍ광산(Mine)을 합친 이름이다. 폐광 이후 정선군에 기부채납된 토지와 부속 건물들을 2009년부터 3년여간 총 120억원을 들여 문화예술 단지로 탈바꿈시켰다. 기존 광산 시설들을 전면 재개발하는 대신 당시의 건물 골조를 그대로 살려낸 게 특징이다. 광부들이 사용하던 샤워실과 화장실은 전시장으로 변신했다. 정비공장은 연인과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으로 바꿨다. 또 입장객을 위한 예술 놀이터와 체험관도 마련됐다. 탄광 내 수평 갱을 활용한 포도주 저장고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볼거리다. 지난 5월 말 개장한 이후 석 달 새 1만5000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삼탄아트마인의 김진만 전무는 “삼탄아트마인의 키워드는 흔적과 소생”이라면서 “버려진 과거에서 뭔가 창조적인 길을 찾아본다는 테마를 앞세워 정선군을 아시아의 문화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는 2002년부터 278억원을 투자해 경전선 폐선 구간(광주역~동성중)에 길이 7.9㎞, 면적 11만3000여㎡(약 3만4200여평)인 ‘푸른길 공원’을 만들었다. 소음이 많아 민원이 끊이지 않던 경전선 도심 통과 구간을 공원으로 만든다는 건 광주 시민들이 낸 아이디어다. 철도 주변에 다양한 나무를 심어 도심 속에서 자연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푸른 숲길을 조성했다. 지역 내 예술가들의 재능 기부로 공원 곳곳에 수백 점의 벽화도 그려넣었다. 다국적 기업도 힘을 보탰다. 글로벌 주류회사인 페르노리카코리아는 지난 4월 푸른길의 랜드마크인 농장다리 지역을 중심으로 약 200m 구간에 도심형 텃밭인 ‘장다리’를 조성했다. 푸른길 공원은 이제 하루 3만 명의 시민과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강운태(65) 광주광역시장은 “인근 주민들에게 ‘주변에 좋은 공원이 있어야 땅값도 올라 장기적으로 주민 삶에 도움이 된다’고 설득한 게 성과를 냈다”고 말했다. 강 시장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로 유엔 해비탯이 수여한 국제환경대회상도 받았다”며 “앞으로 프랑스 보르도의 자전거길이나 미국 버지니아의 크리퍼트레일 공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공원으로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걷기에다 스토리를 더해 재미
대구광역시 중구의 ‘골목길로 떠나는 근대로(路)의 여행’이 대표적이다. 대구시 중구청은 시민 제안을 토대로 오래된 주택가였던 골목길에 ‘근대로의 여행’이란 테마를 입혔다. 골목길에 있는 건물들마다의 다양한 사연과 역사를 소소히 풀어내는 전략으로 성공 스토리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중구 동산동에 있는 ‘선교사 스윗즈 주택’에 대해서는 “옛 대구읍성 밖 서쪽에 있던 조그마한 동산(東山)의 남쪽 부분에 지어진 집으로 대구에 기독교가 전파된 1900년대 초부터 마르타 스윗즈 등 선교사들이 거주해 왔다”라고 설명해 주는 식이다. 북성로 공구골목 중간에 있는 80년 넘는 건물을 카페로 개조해 만든 ‘카페 삼덕상회’처럼 근대 건축물을 개조해 새 컨셉트의 건물로 바꾸기도 한다. 이야기를 입혔을 뿐이지만 반향은 컸다. 관광객이 늘면서 인근 상점 매출도 2010년보다 30~40%가량 뜀박질했다. 지난해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등이 주는 ‘2012년 한국 관광의 별’ 수상 지역으로도 선정됐다. 2010년 1개 코스(총 길이 700m)에 불과했던 골목길 투어는 현재 5개 코스, 10㎞로 늘어났다. 요즘은 ‘사라진 옛길(골목길) 복원사업’을 통해 끊어진 1000여 개의 길을 잇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1900년대 초에 허물어져 도로 이름만 남은 읍성거리에는 상징 조형물을 세우기로 했다. 동성로와 서성로 일대의 한옥 수십 채를 숙박시설(게스트하우스)과 한옥촌으로 개조하는 작업도 한창이다.

충북 괴산군도 ‘산막이 옛길’을 내세워 관광자원 개발에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산막이 옛길은 괴산 호수를 따라 펼쳐진 길이 4㎞의 산책로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옛 산길을 따라 복원했다. 호수변 나무 데크길 옆에는 고인돌 쉼터와 연리지, 소나무 동산 등 30여 가지의 볼거리도 만들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2011년 88만 명이던 산막이 옛길 방문객은 지난해 132만 명으로 늘었다. 땅값도 올랐다. 이 길이 위치한 괴산군 칠성면 내 토지의 지난해 공시지가는 1년 전보다 평균 17.91%나 뛰어올라 충청북도 내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개발 의욕만 앞서 무산되는 경우도
‘한옥마을’로 유명한 전북 전주시는 최근 후백제 역사 찾기에 한창이다. 한 해 7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을 만큼 한옥마을이 성공했지만, 조선시대 중심의 역사 문화권으로만 인정받아 왔기 때문이다. 지난 7월 후백제 역사 재조명 프로젝트인 ‘후백제 문화창조 900’ 계획을 발표하고 내년 말까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궁성 터로 알려진 동고산성 등을 새롭게 단장하기로 했다.

과거부터 내려온 지역 내 유명한 전통이나 위인들의 이름을 딴 축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전남 완도군의 장보고 축제와 진주 남강 유등축제 등은 이제는 외국인도 찾는 명물 축제로 꼽힌다.

물론 지자체들의 이런 노력이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다. 기껏 많은 예산을 들여 관련 시설을 정비해도 관광객이 기대만큼 오지 않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사업이 무산되는 경우도 많다. 서울시는 오세훈 전 시장 재임 당시 마포구에 있는 서울화력발전소(당인리발전소)를 폐쇄하고, 그 자리에 영국의 테이트 모던 프로젝트를 본뜬 ‘문화창작발전소’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당초 발전소를 지하화한 뒤 지상에 문화창작발전소를 세운다는 계획이었지만, 발전소 완전 이전을 요구하는 주민의 반대에 부닥쳐 사업은 아직도 표류하고 있다.

특정한 랜드마크 인근만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여장권 서대문구 환경도시국장은 “서울처럼 과밀한 지역에서는 지역 내 다른 공간과 종합적인 연계성을 따져 과거의 거리나 건물을 복원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개별 지자체의 사업으로만 맡기지 말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역사 보존 사업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현재 중앙부처별로 분산돼 있는 관련 기능을 통합해 정책 조율을 활성화하고, 종합적인 비전을 통해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실천계획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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