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천년만의 재 발견|고려초기 악사석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얼마나 오랜 기간 버려져 왔을까. 높이6m를 헤아리는 거대한 돌부처는 무릎 위까지 흙에 덮여 있다. 햇빛을 가리운 아름드리 잠목 들에는 아직도 덤불 속이었던 종전의 자취가 역연하고 공양을 잊은 세속이 야속한 듯 돌부처는 반만큼 앞으로 넘어져 눈길을 떨구었다.
마을의 고노가 귀뜸 하는 말은 워낙 명당자리라서 바로 뒤 언덕에 무덤을 쓰고 이 돌부처를 쓰러뜨리려 하니 ??천에서 뇌성벽력이 쳐 좇아버렸다고 한다. 그 뒤 아무도 이 영검한 부처에 감히 손대지 못했다는 옛 얘기이다.
충남 온양온천에서 남으로 7km. 유구로 향하는 한 길에서 멀지 않으련만 이제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숨겨있던 까닭이 냉큼 납득되지 않는다. 해발2백m남짓한 망산의 동으로 뻗은 끝 부리 쯤. 삼면을 산줄기가 감싸안고 남쪽으로만 분지의 들판을 내다보고있어 이 원굴골 (아산군송악면평촌리)을 「연화부수」라 일컫는다. 역시 부령산맥 속이라서 몇 십넌전만 해도 산신령님 (범) 이 나다나곤 했다고 한다.

<보물로 지정할만한 가치>
돌부처 뒤로 다가선 한 채의 선식 기와집은 해방 이듬해에 한 노무가 지은 것. 석불의 잊어버린 내력은 예로부터 더듬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사적기 라고 쓴 작은 돌비석을 세우고 「산 이름은 천마요, 절 이름은 ??이라. 신라 애장왕 36년에 원망의 창건이요, 고려 광종27년 초명조사가 중창 하니라…. 』 무엇에 증거하여 기록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사찰은커녕 석불에 대해서조차 동국여지승람이나 읍지 같은 옛 문헌에 한마디 언급이 없다. 현재의 관리는 온양읍소재의 정업원(주지 전단석) 이 근년에 이를 매입, 수좌 한명을 보내 지키게 하고 있을 뿐이다.
석불의 머리는 곱슬머리 (나발)의 일반적인 여래상. 눈을 지그시 감고 짐짓 웃음을 머금은 입 언저리로 근엄함이 감도는데 이마에는 백호대신 금은이 휘황하게 씌워 있었을 것이고 귀에는 금식이 드리워져 있었던 증거로 구멍이 뚫려있다. 목에는 삼도 조각이 선명하고 두 손으로 감싸쥔 여합은 이 불상이 막사여래임을 설명한다.
최근 이 불상을 조사해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한 ??국대 박물관 정영호관장은 고려 초인 1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그 당당하고 훤칠한 조각 솜씨가 충분히 보물로 지정 할 만 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정관장은 왕래가 번번한 온양근동에 이런 귀중한 불교미술품이 묻혀 있었다니 도리어 이상스럽다고 고개를 갸우둥한다.
6m높이의 독존원불이라면 우리 나라의 불상가운 결코 작은게 아니다. 경주석굴암의 대불의 약2배. 6m가 넘는 것으로서 바위를 깎아 새긴 각불 (마암불) 은 더러 있지만, 원불로는 부여군 임천의 대조사미륵보살입상(보물 217호·10m)과 논산군 은진미륵으로 통칭되는 권촉사 미륵보살입상(보물 218호·18m)이 있을 뿐이다.

<밀교의 수도장인 듯>
그들 보살상이 여러 개의 들로 쌓아 올린 거석상임에 비해 이번 발견한 석불은 한 개의 돌로 깎았고 또 그보다 오래된 여래상이란 점이 주목되고 있다. 즉 독존의 여래상으로는 이 온양 석불이 가장 큰 것이다. 전신의 3분의1이 실히 되게 무릎을 흙 속에 묻고 있음에도 현재의 높이 4m. 1m나 되는 얼굴은 지붕 위로 우뚝 솟아 있다.
깨진 옛 기왓장이며 불탄 주춧돌이 이 계곡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면 석불은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서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아늑한 지세는 그 옛날 수도도장이 있었음 직하고, 마을 사람들이 산신당 자리라고 지적하는 것을 들으면 소사여래와 밀접한 밀교의 터전임을 짐작할 만하다.
약사여래와 밀접한 번교의 터전임을 짐작할만하다.
약사여래를 주불로 모시는 불교 신앙은 10세기 전후하여 한반도에서 가장 성행했다. 약사는 대의왕불. 동방으로 많은 세계를 지나서 유리세계가 있으니 그 교주가 곧 모든 고난과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해주는 약사여래인 것이다. 온갖 죄악과 고통이 없는 유정한 극락국토이다.
약사여래의 정토는 동방이라는 데서 우리 나라와 인연이 가까왔는지 모른다. 일찌기 신라에서는 분황사에 약사여래를 모셨고 고려시대의 약사상은 비교적 많은 펀이다. 예사신앙은 역시 인생의 모든 욕구와 문제를 어떤 신비한 힘에 호소하여 성취하려는 속세적인 점에서 밀교에 속한다.
그러나 황숙영 동대박물관장은 보다 더 역사적 실증을 통하여 이 약사여래가 이곳에 서있는 이유를 밝히러 한다. 물론 가설을 전제하는 추정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마지막 결전을 한데가 이곳 아산군송악면 일대가 아니냐는 것이다.

<왕건의 마지막 격전지>
왕건은 개국 초의 토벌작전에 전몰한 장병을 위로하기 위하여 달산 개태사를 일으켰고 평학의 예사사도 그런 성격을 띤다. 평촌리에 이웃한 궁뜰 즉 궁평리란 이름과 거기 낡은 석성이 남아있음은 연고 있는 사저지로서의 암시가 있다. 산등성이 하나 격해 구온양읍내에있는 같은 시대의 관간지왕도 이 석불과 관련은 없을까. 황교수는 특히 개성 송악과 아산송악에 대하여 명칭상의 공통점을 입증할만한 자료가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한다.
어쨌든 불이 도톰하여 당불의 양식을 느끼게 하는 이 석불은 시대를 더 올려 보려해도 옷 주름이 도식화돼있어 고려 초로 보는게 타당하리라는 것이 관계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이불상은 귀중한 문화재로서 지정케 되면 흙 속에 묻힌 부분도 드러내게 됩은 물론 황좌위에 바로 세움으로써 땔군 눈을 들어 맑은 햇빛을 바라보게 되리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