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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북과 남의 형세(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남침준비(1)>
이번 회부터는 북과 남의 형세 부제로 6·25직전의 북괴와 우리 한국의 실정을 비교 대조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결론부터 한마디한다면 여기에는 북괴의 빈틈없는 남침준비와 우리측(한국과 미국)의 놀랄만한 방심과 허점이 부각 대조된다. 문제접근은 가장 길었던 3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각종 내외자료와 여러 증인회견담을 종합 정리하는 방식을 취하겠다.
북괴가 1950년6월25일 상오4시를 얼마나 가슴조이며, 기다렸으며, 또한 자신만만했는가는 T·R·페런바크저 『이런 전쟁』에 생생하게 기록돼있다.
북괴군 제2군단 작전참모 이학구총좌는 꼬박 2주일동안 불철주야로 일해왔다. 1950년6월15일부터 괴뢰군 전사단이 주둔지를 떠나 38선 근방의 출발선에 배치되고 있었다.

<자신만만했던 북괴군>
그것은 참모의 고되고도 방대한 작업이었다. 6월24일, 토요일밤의 어둠이 내리자, 이학구는 네모난 얼굴에 긴장을 풀고 한가로이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북한괴뢰의 토요일 밤은 아무런 뜻이 없으나 6월23일부터 모든 괴뢰군부대가 배치 완료되고 몇시간동안, 정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참모의 훌륭한 작업이었다.
번쩍번쩍하는 가죽장화를 신고, 소련스타일과 비슷한 청색제복을 입은 총좌는 잠시 지난 며칠동안의 혼란과 고역을 회상해 보았다. 그것은 8만대군의 이동이었다. 고지에서 그리고 멀리는 압록강에서 사단이 내려왔다.

<8만 대군을 전방에 옮겨>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미국과 남한의 위정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리…이학구는 생각했다.
괴뢰군사령관 최용건과 만주벌판에서 전투경험을 가진 참모들은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지난 1월 북평에서 남침을 계획한 소련·중공·북괴의 3자 고위회담후 괴뢰군은 소규모의 신규군으로써 6개월만에 불가사의를 만든 것이다.
6월23일 금요일밤중 9만명이 가랑비 속에서 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탱크 1백50대, 공군기 2백대, 각종 소화기와 다량의 박격포, 1백22㎜곡사포, 76㎜곡사포를 갖춘 7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사단, 1개 독립보병연대, 1개 오토바이연대, 보안대 1개 연대의 병력이었다.

<18일에 정찰명령 제1호>
6월18일에 이미 이학구와 그의 막료는 명령을 하달한 뒤였다. 첫째는 소련어로 쓰여진 정찰명령 제1호로서 각 사단공격로를 따라 남한의 방어진에 관한 정보를 24일안으로 입수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괴뢰군 정보부에서 내린 것이었다.
북괴는 많은 첩자를 남한에 보냈는데 이중에는 한국군에 파견된 미군사고문단에서 직접 일하는 자들도 있었다.
소련어를 사용하는 북괴정보장교들은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6월22일에 각 사단에는 한국말로 된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제1, 제3, 제4사단은 탱크부대를 선두로 서울을 향해서 의정부 회랑을 공격하고 그외의 사단은 동부를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일반 사병에게는 대기동 훈련이라고만 말했지만 그들 군관들은 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젊은 이학구는 눈이 충혈되어 연거푸 담배를 빨았다. 그는 전방작전지휘소에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은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고, 퀴퀴한 흙과 퇴비냄새가 풍겼다.
그는 피로했다. 그러나 분초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는 흥분으로 바싹 긴장돼 있었다. 그러나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명령은 내려졌다. 따라서 모든 것이 그대로 움직였다. 괴뢰군은 소련과 중국에서 훈련을 받은 광신적인 고병들을 중심으로 편성되고 이들외에 많은 징집병이 있었지만 이들도 명령을 따를 것만은 분명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
뒤통수에 권총을 들이대는 괴뢰군에게는 주저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학구는 다시 한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작전상황실에서 가죽장화에 푸른 바지를 입고 둘러선 다른 군관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모두 젊고 건강했다. 중국이나 소련에서 젊은 한때를 보낸 역전의 군관들이었다. 그들은 일본과 싸우고 장개석 군대와도 싸웠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군과 싸우려는 것이다.
곳곳에서 계자빛 무명천 군복을 입은 사병들이 새벽전의 어둠을 타고 비에 젖으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육중한 곡사포의 포구에는 덮개가 벗겨지고 탱크도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억수같이 퍼붓던 비도 어느새 가랑비로 변했다.
초록색의 논에는 물이 흥건히 괴었다. 그러나 길은 딱딱하고 굳었다. 드디어 크고 장신의 포를 가진 탱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천남쪽 골짜기 뒤에는 2개 사단이 진격명령을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군관들이 바른손을 번쩍 들었다. 분대장들은 빽소리를 지르며 호령을 내렸다. 중포는 이미 오래전에 출동준비가 돼있었다.

<상오 4시에 일제히 침공>
그러자 고함소리가 터지고 시커먼 대포는 하늘을 향해 불을 뿜었다. 동해서부터 서쪽의 안개가 자욱한 서해의 모래사장에 걸쳐 서울로 이르는 모든 길은 포화와 총성과 소음으로 날이 새었다. 탱크들은 바퀴뒤에 진흙을 내뿜으며 전진했다.
소련 늪지대에서 쓰도록 만들어서 한국의 굳은 땅을 구르기란 손 쉬었다.
그뒤에는 갈황색의 제복을 입은 조그만 인간들이 아우성을 치며 뒤따랐다.
『만세!』이학구 총좌는 소리쳤다. 뒤이어 그의 참모들이 복창했다. 그들의 눈은 빛났다.
1950년6월25일 상오 4시였다. 다음은 바로 이학구군단의 괴뢰군 제2사단에서 화천 공격명령을 받고 남침했다가 그후 대한민국에 귀순한 전괴뢰군하사관의 발언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김석용씨(당시 북괴민족보위성정찰국 제3부·북괴군제2사단파견근무·중사·현 수협중앙회근무·38)
북괴의 전쟁준비는 6월초의 군이동으로 시작됐지요. 나는 5월말에 회령에 있는 제3군관학교에서 갑자기 민족보위성정찰국으로 전속명령이 내려 곧 함흥에 있는 제2사단에 배속됐습니다.

<6월초부터 부대이동>
6월7일에 번개라는 전투비상소집명령이 하달되어 10일에 기차편으로 함흥을 떠났습니다. 주로 야간에만 기차가 움직여 강원도 금화에 도착한 것은 12일하오 2시쯤이었지요. 금화역구내에는 병력과 군장비가 꽉 차있었고, 역에서 탄약과 식량배급을 받았어요. 병사마다 탄알 1백50발, 자동다발총탄 2백16발, 수류탄 4개, 쌀과 소련제 건빵 3일분씩이었지요.
모든 병사가 위장을 한 다음 금화로부터는 도보행군으로 13일에 화천에 도착, 15리가량 전방에 나갔지요. 그런데 이미 전방에는 제2사단작전과장 전문섭(대좌)을 비롯한 선발부대가 도착해 있어 부대위치를 선정하고 정지작업을 하고 있더군요. 나는 민족보위성 파견근무이기 때문에 사단참모장과 작전과장의 자시만 받게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지휘감시소에 있었고 다른 사병들은 개인호를 파고 그속에서 전투준비를 했어요.
그때 2사단 장비로서는 3개 연대병력에 서모호트대대(주=서모호트란 일명 자주포라고도 하는데 탱크와 흡사하나 위 뚜껑없이 76㎜직사포와 중기관총으로 무장돼있다), 1백22㎜곡사포대대, 76㎜곡·직사포대대, 1백22㎜박격포대대 등으로 매우 우수했읍니다. 특히 76㎜포는 일명 스탈린포라고도 하며, 2차대전때 독일군을 격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포입니다.

<민간복입은 소련군 고문>
사단에 수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상당수의 소련군 고문들이 민간복장을 하고 배속돼 있었어요.
6월23일 하오10시쯤 비상이 내려 각 소대단위로 전투명령이 하달됐습니다. 그런데 45㎜직사포를 분해하여 최전방까지 운반, 국군초소로부터 2백∼3백m 사정거리에다 조립해 놓았고, 5m간격으로 박격포를 나열했읍니다.
전투개시 신호는 아까 말씀한 75㎜ 스탈린포를 국군진지에 한발 쏘면 일제히 공격하게 돼 있었읍니다.

<최초의 일발은 국군식당에>
6월25일 상오4시20분쯤 드디어 스탈린포 한발이 북한강 다리옆의 국군식당위에 바로 터졌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남침이 시작된거지요.
본래 하달된 작전명령은 6월25일에 북한강을 건너 국군제일선을 점령하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북한강가가 매우 어렵다고 예상한 탓이지요. 그러나 공격개시후 15∼20분 계속 포를 쏜후 손쉽게 다리를 건너 상오6시쯤에는 사단본부가 다리를 건넜지요.
2㎞쯤 전진하니까 벌써 춘천을 점령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시내쪽에서 유류탱크가 타는 연기가 충천하는게 보였어요. 그래서 포병과 보병의 도착도 기다리지않고 자주포부대를 선두로 춘천으로 진격하다가 산속에 매복한 국군의 포격으로 전투개시 4시간에 2사단포병대장 안빈(대좌)이 죽고 그밖에 많은 사상자를 냈지요.
한편 바로 6·25때 38선 접경근처에 살다가 월남해온 한 민간인은 북괴군의 이동상황이 반공개적이었는데 왜 한국이 기습을 받게됐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전재열씨(당시 강원도고성군××면×X리 거주·현 서울에서 주류업·45)
1950년6월8일을 기해 북괴전역의 철도는 비상사태에 들어갔지요.

<남하하는 군용열차 홍수>
특수공무를 제외하고는 일체 여행이 금지됐고, 특히 원산에서 양양에 이르는 동해선은 평상시의 열차 다이어가 전면폐지되고 심지어는 그들이 최우대하는 외금강 노동자 휴양소까지 폐문했지요. 6월8일 새벽부터 38선을 향하여 남하하는 군용열차가 줄을 이었고 외금강에서는 급수·급탄등 조차가 밀려 4, 5개 열차가 끝없이 줄을 지었지요.
객차·유개차·무개차가 순서없이 편성되었고 거기에는 군인을 비롯하여, 탱크, 포, 차량외에 심지어 마차까지 산적돼 있었습니다. 노출을 꺼리는지 열차는 터널속에도 있었고…. 오후가 되니까 이번에 자동차부대가 강로로 밀려오더군요. 외금강에서 38선까지는 약 2백리인데, 사태는 심상치않다고 보았지요. 이 많은 열차가 어디서 나왔나하는 정도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만주에서까지 빌어왔다더군요.
군용열차는 6월24일까지 계속 내려왔습니다.

<접경주민들은 전쟁 예감>
38선에 근접한 주민들은 이 급변을 보고 6·25를 예감치않은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이런 사태를 보고 대부분의 이북주민들은 내심 기뻐하고 흥분했지요. 북괴가 먼저 건드려 38선이 터지기만 하면 이북해방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국방부 보도과에서 KBS를 통해 국군모대위가 대북방송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것을 이북주민들은 굳게 믿었거든요.
그 당시 이북의 주민은 북괴가 남북협상대표 2명을 개성엔가 파견한다는 말도 있고하여 식자간에는 이것은 태평양전쟁때 일본이 미국에 보낸 야촌·구푸스대사에 비유하기까지 했지요.
6월24일 밤8시쯤으로 기억하는데 평양방송을 통하여 25일 상오쯤에 중대방송이 있으니 꼭 들으라는 거예요.
이렇게 이북에서 본 6·25는 이남처럼 의외가 아니었지요. 25일 아침나절에 국방군의 북침을 반격하여 일제히 남하, 소위 남반부를 해방시킨다는 방송이 있었어요.
그날로 금강산휴양소는 야전병원으로 변했지요. 저녁이 되자 일반의 통행은 엄금되고 노변의 집에는 커튼을 치고 밖을 보지말라고 포고가 나왔어요.
그러나 귀까지 막을 수는 없지요. 초저녁부터 들것에 실려 멀리 들려오는 부상병의 신음소리와 아우성은 대단했습니다.
역전 나무그늘에도 그들 부상병은 많았어요. 며칠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들이 팔로군출신의 조선의용군에 있던 자들 이라더군요.
이북주민은 이렇게 6·25를 고대했지만 전선은 자꾸 남하한단 말이에요.
날이 갈수록 국군에 불리하기만 했지만, 차츰 야전병원에 새로 들어오는 부상병으로부터 미군참전소식을 듣고 광명을 기다렸습니다.

<남침 왜 몰랐는지 의아>
6·25를 17일이나 앞두고 그들의 남침준비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알 수 있도록 대규모로 노출되어 진행됐는데 이북에서는 누구나 예감한 것을 그 당시의 한국군부나 정보기관이 감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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