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현실·영상 오가며 농염한 듯 아련하게 댄스, 댄스, 댄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37호 08면

어셔홀 앞에 설치된 김형수 교수의 설치 작품 ‘미디어 스킨’
1 에든버러성.

1947년 시작된 영국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이하 EIF)은 연극과 무용, 오페라와 뮤지컬, 클래식과 현대음악의 최신 경향을 아우르는 세계 최고의 예술축제다. 2차 대전의 상처를 예술로 아물게 하자는 기치로 시작해 지금까지 지속돼 왔다. 8월 9일부터 9월 1일까지 열리는 올해 67회 행사에는 40개국 3000여 명의 예술가들이 참석한다.

2013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을 가다

2006년부터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조너선 밀스가 내세운 올해의 주제는 ‘아트와 테크놀로지’. 이를 위해 그가 화두로 삼은 두 명의 인물이 르네상스 시대의 만능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와 한국의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이다. 예술과 기술을 융합해 새로운 스타일의 아트를 창조해낸 이들의 정신을 21세기에 새롭게 구현해보자는 의도다(이와 관련해 다빈치가 직접 그린 1511년 무렵의 해부도 30점과 현대 의학의 MRI·3D 영상을 비교한 영국 왕실 컬렉션 ‘레오나르도 다빈치: 인간의 역학’(8월 2일~11월 10일)전이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의 퀸스 갤러리에서, 1953년 독일 부퍼탈에서 열린 백남준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의 50주년을 기념하는 백남준아트센터의 ‘백남준의 주파수로: 스코틀랜드 외전’(8월 9일~10월 19일)이 에든버러대 탤벗 라이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EIF에서 이들의 정신에 가장 근접한 ‘한국 대표팀’이 있다. LED 설치물 ‘미디어 스킨(Media Skins)’을 선보인 김형수(54)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교수, 무대와 영상이 어우러지는 ‘마담 프리덤(Madam Freedom)’을 내놓은 프로젝트 그룹 YMAP(Your Media Arts Project)의 김효진(43) 안무가다. 이들 예술가 부부가 각각 EIF의 공식 초청을 받고 맞춰본 아트와 테크놀로지의 궁합은 과연 어떤 패일까.

2 어셔홀 앞에 설치된 김형수 교수의 설치 작품 ‘미디어 스킨’
3 에든버러성에서 바라본 시내 풍경

스코틀랜드의 혁신 정신과 ‘미디어 스킨’
도착 첫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김형수 교수가 뮤지엄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공연 보러 왔는데 웬 뮤지엄?

“스코틀랜드는 인벤션과 이노베이션의 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에요. 이번 EIF의 기본 주제도 그것이고. 그걸 제대로 알려면 뮤지엄부터 가봐야 합니다.”

국립 스코틀랜드 뮤지엄 본 전시장에서 처음 관람객을 맞는 것은 제임스 와트(1736~1819)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이었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인근에서 태어난 그는 기존 증기기관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공로를 인정받았고 덕분에 ‘와트’는 동력의 단위가 됐다. 알고 보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자기파의 존재를 처음 예견한 물리학자 제임스 맥스웰(1831~1879)도, 1925년 최초로 TV를 발명한 전기공학자 존 로기 베어드(1888~1946)도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

지난해 조너선 밀스 예술감독의 초청을 받고 어떤 작품을 선보여야 할까 고민하던 김 교수에게 영감을 준 인물도 스코틀랜드 출신의 수학자 데이비드 브루스터(1781~1868)였다. 그가 1817년 발명한 만화경(Kaleidoscope·萬華鏡)이 아이디어의 단초였다. 렌즈 속을 들여다보며 통을 잡고 돌리면 수많은 그림 조각이 계속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그 만화경 말이다.

2009년 서울 빛축제 총감독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영상작업을 해온 그는 인간과 자연이 이뤄온 ‘혁신’의 모든 조각을 우주적 시각에서 조망해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의뢰, 아리랑 2호와 3호가 찍은 세계 유명 도시 및 자연환경 사진을 받아 색감과 이미지가 맞춤한 32곳을 추려냈다. 그것을 프로그래밍해 끝없이 꿈틀대는 이미지로 만든 게 설치작품 ‘미디어 스킨’이다.

“도시는 인류가 만든 모든 혁신의 집합체죠. 자연은 신이 만든 혁신의 산물이고요. 에든버러의 널찍한 평원에서 시작해 굵은 붓질 같은 서울의 한강, 그리고 인공미의 극치인 카타르 도하 등과 아마존강·애리조나 사막 같은 황홀한 자연이 13분 단위로 명멸하지요. 백두산·한라산·독도의 아름다움은 세계인들에게 꼭 알리고 싶었어요.”

‘미디어 스킨’은 두 곳에 설치됐다. EIF 개막식이 매년 열리는 유서 깊은 어셔홀 앞에는 가로 7.8m, 세로 1.8m, 총 높이 3.8m짜리의 4개면 LED 영상박스가 4대 세워졌다. 역시 3000석 규모의 메인 극장인 페스티벌 시어터 유리 외벽에도 8개 LED 칼럼을 설치했다.

4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이 열리고 있는 홀리루드하우스 궁전 퀸스 갤러리에서 관람객이 3D안경을 쓰고 화면을 보고 있다.

EIF 개막식을 30분 앞둔 9일 오후 6시30분, 올해의 개막작처럼 ‘미디어 스킨’이 점등되자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현란한 영상과 함께 스코틀랜드 민요(The Bonnie Banks of Loch Lomond)와 한국의 아리랑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버클리 음대 출신의 작곡가 표신엽씨가 작업한 곡조에 맞춰 영상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매일 12시간 동안 불을 밝힌다. 어셔홀 맞은편 셰러턴 호텔 계단에 앉아 있던 로렌 블랙키(23)와 타일러 로스(22) 커플은 “끝내준다(gorgeous). 페스티벌이 끝나도 계속 전시하면 안 되겠느냐”며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눌렀다.

김 교수는 “공연 내용과 관객 성향이 보수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것으로 유명한 이곳에서 뭔가 새로움으로 승부해야 할 때라는 밀스 감독의 전략이 성공을 거둔 느낌”이라고 말했다.

5 백남준 전시가 열리고 있는 에든버러대 탤벗 라이스 갤러리.
6 안무가 김효진의 ‘마담 프리덤’ 공연 장면.

무대와 영상을 넘나드는 무용수 ‘마담 프리덤’
레벤 스트리트에 있는 킹스 시어터는 EIF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고색창연한 극장이다. 다른 메인 극장들이 유리 등으로 리모델링을 했지만 이곳은 여전히 옛모습을 고수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김효진 안무가와 YMAP의 ‘마담 프리덤’이 20일과 21일 ‘유러피언 프리미어’로 공개됐다.

1950년대 후반 한국을 뒤흔든 정비석 작가의 소설과 한형모 감독의 영화인 『자유부인』에서 제목을 차용한 이 작품은 한 가정주부의 일탈에의 욕망을 무대와 영상이 뒤섞이는 스타일로 독특하게 그려내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다. 20일 오후 8시 객석 1층은 빈자리가 거의 없어 보일 정도였다.

불이 꺼지고 무대 위 3개 측면에 늘어뜨린 대나무 발 위로 영상이 비춰졌다. 상반신을 노출한 한 여인의 뒤태였다. 이어 두 명의 여인이 그 여인에게 한복을 한 겹씩 입힌다. 가채까지 쓴 분홍 저고리와 푸른 치마의 여인은 무대 정면을 조용히 응시하다 이윽고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가야금과 북소리 선율에 맞춰 김효진씨가 현대적으로 구성한 태평무를 추기 시작했다. 한복 대신 검정 블라우스와 통넓은 검정 8부 바지 차림으로 추는 전통 춤은 색달랐다. 모든 장식을 뺀 미니멀리즘 회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태평무는 가장 정형성이 강한 춤입니다. 저는 이 춤에서 장식을 빼고 동작과 움직임만 남겨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틀을 정형화하고 나면 우리 춤도 발레처럼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죠. 발레가 수직과 수평의 움직임이라면 한국 춤은 원형의 움직임인데 그게 동그란 원이 아니라 무한대의 패턴을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있다고 세계에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 무대에는 1930년대 히트작인 고복수의 ‘타향살이’ 공연 실황 장면이 비춰졌다. 그런데 고복수씨가 노래하는 모습 뒤로 흔들흔들 춤을 추며 가는 여인이 보인다. 김효진씨다. 정교한 CG 작업 덕분에 무대 위의 김효진과 영상 속의 김효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현실과 영상을 종횡무진했다가, 『인형의 집』의 노라와 같은 심정이 되어 친정을 떠난 여인네의 구슬픈 심정을 노랫속에 담아냈다.

세 번째 무대는 영화 ‘자유부인’의 댄스홀 장면. 오 마담이 춤 선생에게 결국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이 1950년대 댄스홀과 2013년 서울의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카페 등 시공이 뒤섞인 공간에서 혼재된다. 김효진과 세종대 김형남 교수가 밀고당기며 추는 맘보·왈츠·탱고 2인무는 농염한 듯 아련하다. 이 무렵 등장한 곽재혁씨의 힘차면서도 애절한 태평소는 스코틀랜드 백파이프를 능가하며 문득 가슴을 먹먹하게 쳤다.

다시 김효진의 독무. 사이키델릭한 음악 한가운데로 삶의 무게를 표현한 듯한 수없이 많은 큐빅 이미지, 오체투지를 하듯 차례차례 바닥에 엎드리는 김효진의 수많은 분신, 이 모든 것이 공(空)이라는 듯 뭉실대는 물거품, 그리고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며 웅변하듯 먹이를 향해 몰려드는 잉어 떼의 모습까지-. 마지막으로 한복 여인의 액자, 맘보춤을 추는 무희가 나오는 TV, 비어 있는 어항이 보이는 화면 속으로 등장한 김효진이 스위치를 툭 하고 꺼버리면 엔딩이다.

공연 후 소감을 들려주기로 했던 영국 최고 유력지 더 타임스 기자는 로비에 없었다. 모든 기자들이 기사 써야 한다고 가버렸단다. 21일 오후 더 타임스 인터넷판 리뷰 지면에는 “이 얼마나 흥미롭고 내실있는 멀티미디어 무대인가”라는 호평이 별점 3개와 함께 올라왔다. 보수적인 성향의 스코틀랜드의 유력 일간지 스코츠맨도 21일자로 “후반부 10분 동안의 솔로댄스는 아주 훌륭(stunning)했고 쇼는 대성공(triumph)”이라며 역시 별 셋을 주었다. 역시 유력지인 '더 헤럴드'는 스코틀랜드판 22일자에서 무려 별 넷을 주었다. 평론가 메리 브렌넘은 "과거의 맥락 속에서 21세기 여인의 모습을 매우 훌륭하고 열정적으로(superbly dynamic) 그려냈다"고 극찬했다. 이 신문은 또한 젊은 평론가 집단체제를 운영하고 있는데, '마담 프리덤'에 대해 리뷰를 한 12명의 젊은 평론가 중 1명이 별 5개를 준 것을 비롯해 6명이 별 4개, 4명이 별 3개를 주는 등 호평 일색이었다.

7 에든버러 시장 주최 리셉션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 왼쪽부터 전혜정 주영한국문화원 사업총괄팀장, 안무가 김효진, 도널드 윌슨 에든버러 시장, 조너선 밀스 EIF 예술감독, 김형수 교수, 김갑수 주영한국문화원장.

“최고 전문가들이 서로 상의하며 만들어가는 게 비결”
20일 공연이 끝나고 오후 10시30분부터 도널드 윌슨 에든버러 시장이 주최하는 파티가 시청 본관에서 열렸다. 중국 공연단과 함께 초청된 이 자리에서 조너선 밀스 예술감독은 “한국 작품들은 올해의 주제를 건강하게 표현했다”며 “예술가뿐 아니라 예술단체, 정부가 모두 적극적으로 나서주어 관객에게 훨씬 어필할 수 있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번 공연 및 전시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앞장서 판을 벌였고,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힘을 보탰다.

김형수 교수는 지난해 여름부터 1년이 넘게 EIF 사무국과 일하면서 왜 이들이 70년 가까이 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하청업체 직원이 아닌 진짜 전문가들이 토론을 통해 한치의 오차도 없도록 헌신적으로 일하는 풍토를 꼽았다. “나는 당신의 스태프라는 자세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려는 진지한 태도에 감동했어요. 280쪽짜리 영문 매뉴얼을 읽고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고역도 있었지만 그만큼 다 함께 작품을 ‘만들어 간다’는 점이 흥행의 진짜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메이저 리그와 마이너 리그의 성공적인 보완을 들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작품을 골라 선보이는 EIF와 젊고 재주 있는 신진 예술가에게 판을 내주는 프린지 페스티벌이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세 번째 비결로 좋은 예술감독을 선정하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선정위원회의 치열한 토론을 거쳐 확정된 최고 수준의 작품 선정만이 축제의 질을 담보한다고 강조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