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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부품 공동 개발·제작까지 ‘적과의 동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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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호 22면

#미국 자동차 제조업체 크라이슬러의 대표모델인 지프 컴패스는 현대차의 기술 없인 움직일 수 없다. 직렬 4기통 2.4L 엔진은 현대차가 2004년 독자 개발해 선보인 ‘쎄타(Theta)’ 엔진에 뿌리를 뒀다. 이 엔진은 2005년 현대차와 미쓰비시, 당시 다임러크라이슬러가 합작해 세운 ‘GEMA(글로벌 엔진 제조연합)’에서도 생산됐다. ‘쎄타’를 기본으로 각 업체가 ‘취향’에 맞게 다듬어 썼다. 미쓰비시 랜서도 이 엔진을 장착한다.

세계 자동차 산업 ‘코피티션(Coopetition·협력형 경쟁)’ 시대

#미니 쿠퍼와 푸조 208은 각각 영국과 프랑스의 대표적 소형차다. 덩치만 비슷할 뿐 외모나 운전 감각은 전혀 딴판이다. 그런데 차 속을 들여다보면 둘 다 직렬 4기통 1.6L 가솔린 엔진을 쓴다. 미니의 모기업인 BMW와 푸조의 모회사인 PSA 그룹이 손잡고 개발한 엔진이다.

경쟁하며 협력하는 공생관계
최근 세계 자동차업계의 추세는 ‘코피티션(Coopetition)’이란 말로 대표된다. ‘협력(Cooperation)’과 ‘경쟁(Competition)’을 합쳐 만든 신조어로 ‘협력형 경쟁’을 뜻한다. 예일대 배리 네일버프 교수와 하버드대 애덤 브란덴버거 교수가 고안한 말이다. 예전엔 기업 간의 경쟁이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제로섬 게임을 의미했지만 이제는 서로 경쟁하되 각자 승리한다는 ‘코피티션’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코피티션’에 가장 적극적인 업체는 푸조다. 2011년 푸조의 모회사인 PSA는 BMW 그룹과 1억 유로 이상 투자해 합작사를 세웠다. 전기차를 공동 개발하기 위해서다. 본부는 독일 뮌헨에 뒀다. 이곳의 연구개발(R&D) 부서엔 400여 명의 인력을 배치했다. 고압 배터리와 전기모터, 발전기 등을 개발해 2015년부터 양산할 차에 적용할 계획이다. 공동 판매도 추진한다.

PSA그룹의 제휴 전략을 보면 이제 기업 경쟁에서 ‘주적’ 개념이 사라진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최대 라이벌인 르노와도 스스럼없이 손을 잡았다. 두 회사는 1997년 자동변속기, 2000년 V6 3.0L 가솔린 엔진을 공동 개발했다. 유럽 포드와도 2001년 1.4L, 2003년 1.6L와 V6 2.7L 디젤 엔진을 함께 개발해 선보였다. 미니용 디젤 엔진은 생산기지마저 아예 영국으로 옮겨 공급 중이다. 미쓰비시로부터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모델인 아웃랜더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받아 ‘4008’란 모델 이름만 새로 단 채 팔고 있다. 피아트와는 94년부터 소형 상용차를 함께 개발·생산 중이다. 양사의 소형 상용 세 차종의 공용 부품 비율은 90%까지 올라간다. 원가가 줄어들고 그만큼 판매가격을 낮춰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다.

푸조는 또 다른 계열사인 시트로앵과 일본의 도요타와 소형차를 함께 개발해 2005년부터 체코 공장에서 생산 중이다. 이름만 ‘도요타 아이고’ ‘푸조 107’ ‘시트로앵 C1’ 등으로 다르게 붙여놓은 ‘세 쌍둥이’ 모델을 각자 따로 판다(아래 사진). 3사는 이런 제휴를 통해 개발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속도 붙는 이합집산 … 개발 비용·시간 절약
경쟁의 원동력이 될 핵심 기술까지 아예 공동개발하는 업체들도 있다.

중형차 시장의 양대 강자인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역시 시장에선 치열한 경쟁자이지만 무대 뒤편에선 손을 꼭 맞잡은 사이다. 2005년엔 GM까지 합류해 세 회사가 하이브리드 기술 공동개발에 나섰다. 벤츠 S400 하이브리드와 BMW 액티브하이브리드7은 주요 부품을 아예 공동으로 쓴다.

일본 차와 유럽 차의 ‘결합’도 진행 중이다. 2010년 벤츠의 모기업 다임러와 전략적 제휴에 들어간 르노·닛산 연합은 내년부터 미국 테네시주의 닛산 공장에서 벤츠가 개발한 4기통 엔진을 연간 25만 대 규모로 생산할 예정이다. 르노 트윙고의 뼈대를 기본으로 벤츠 미니카 스마트의 신형 모델 개발에 나선다.

도요타와 BMW 그룹은 이에 맞서 지난 1월 “미래 기술을 함께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두 회사는 향후 ‘연료전지 시스템’ ‘차세대 스포츠카’ ‘경량화 기술’의 공동개발에 나설 계획이다. 도요타는 과거 선루프 한 장까지 직접 만들 만큼 ‘순혈주의’를 고집했던 업체로 유명했다. 그러나 환율과 리콜 등 위기를 겪고난 뒤 빗장을 열고 적극적인 제휴에 나섰다.

반면 독자 노선을 고집하는 업체도 있다. 폴크스바겐 그룹이 좋은 예다. 산하 11개 브랜드를 통해 대중차부터 고급차, 모터사이클부터 대형 트럭까지 파는 ‘공룡’ 기업답게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 자회사가 많다 보니 하나의 기술이나 부품을 개발해도 제휴보다는 독자 노선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현대차도 폴스크바겐처럼 ‘나만의 길’을 걷고 있다. 2005~2009년 ‘월드 엔진’ 프로젝트 이후 다른 완성차 업체와의 제휴소식은 끊겼다.

중앙대 경영학과 이남석 교수는 “현대차는 70, 80년대 기술 제휴처인 일본 미쓰비시로부터 수모를 많이 겪었던 기억 때문에 독자적인 기술 개발을 강조한 기업문화가 뿌리내려 왔다”며 “미래 자동차 기술의 주류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가능성을 혼자 다 개발하려 하지 말고 다른 업체와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90년대엔 인수합병이 대세
90년대 자동차 업계의 제휴는 ‘규모의 경제’를 위한 인수합병(M&A)이 대세였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90년대 이후 전체 제휴 61건 중 절반 가까운 28건이 경영권을 확보한 직접 인수였다. 부족한 라인업도 채우고 판매망까지 강화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뒷받침됐다.

포드가 대표적 사례다. 포드는 당시 업계 1위였던 GM을 넘어서고 싶어 몸이 달아올랐다. 포드가 내린 결론은 몸집 키우기. 마침 주머니에 현금도 두둑했다. 날개 돋친 듯 팔리던 SUV 덕분이었다. 97~2000년 사이 포드의 순익은 203억 달러에 달했다. 포드는 89년 재규어, 94년 애스턴마틴, 96년 마쓰다를 사들였다. 99년 2월엔 스웨덴 볼보자동차 지분 100%도 거머쥐었다. 이듬해엔 BMW로부터 랜드로버를 인수한다. 그리고 이들 고급차 브랜드에 링컨을 더해 ‘프리미어 오토모티브 그룹(PAG)’을 출범시켰다.

98년엔 독일의 다임러 벤츠와 미국의 크라이슬러가 다임러크라이슬러로 거듭났다. ‘세기의 합병’으로 회자된 파격적 만남이었다. 그 결과 97년 말 기준 자본금 802억 달러, 종업원 41만2000여 명, 매출 1310억 달러의 거대 자동차 그룹이 탄생했다. 생산능력은 연간 380만 대에 달했다. 당시 GM과 포드, 폴크스바겐, 도요타에 이어 세계 5위였다.
 
프로젝트별 문어발 제휴로 바뀌는 추세
90년대 자동차 업계를 휩쓸었던 ‘짝짓기’ 열풍은 실패로 돌아간 사례가 많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가령 국적과 문화가 다른 조직의 문화를 합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효율을 위해 뭉쳤지만 실제로는 중복 투자도 많았다. 또한 조직의 유전자가 섞이는 과정에서 각각의 정체성이 흐릿해진 경우도 생겼다. 시행착오는 실적과 순익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21세기 초 들어 이번엔 ‘파혼’이 줄을 이었다. 90년대 SUV를 팔아 번 돈으로 자동차 브랜드 쇼핑에 열을 올렸던 포드는 애스턴마틴과 재규어, 볼보, 랜드로버를 줄줄이 다시 매각했다. 98년 ‘세기의 결혼’으로 한 살림을 차렸던 다임러와 크라이슬러도 2007년 다시 남남이 됐다.

자동차 업계의 제휴는 이제 그 양상이 달라졌다. 규모가 줄어들되 횟수는 늘고 있다. 주요 완성차 업체의 연평균 제휴 건수를 보면 91~95년엔 2건에 불과했지만 2006~2011년엔 19.2건으로 빠르게 늘어났다.

제휴 목적도 바뀌는 추세다. 단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짝짓기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대신 스스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제휴가 늘고 있다. 예컨대 미국차 업체는 디젤 엔진이나 소형차와 관련된 제휴엔 적극적이다. 유럽차 업체는 엔진과 친환경차 기술을 함께 개발하는 데 열심이다.

셋 이상 업체의 다자 간 제휴, 완성차 업체와 부품 업체 사이의 협력도 진행 중이다. 복수의 업체와 동시에 각기 다른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문어발 제휴’도 늘고 있다. 이 같은 ‘협력형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영원한 ‘적’이나 ‘동지’의 개념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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