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 칼럼] 日 재무장, 한국 核 부추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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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호 30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2월 미국 정부는 독일인을 겨냥해 ‘미국의 소리(VOA·Voice of America)’ 방송을 개시했다. 첫 프로는 독일어로 제작돼 영국 BBC 전파를 탔다. 남북전쟁 때 등장한 장엄한 북군 군가(軍歌)가 흐른 뒤 앵커는 간략한 오프닝 멘트로 역사적 방송을 시작한다. “전쟁과 관련된 뉴스가 우리에게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만 여러분에게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이후 VOA는 전황 중계와 함께 독일 국민과 나치 정권 사이를 떼놓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쳐 큰 성과를 거둔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건 VOA가 나치 정권을 비판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다는 거다. VOA는 미군의 승리가 독일인에게 어떤 혜택을 주게 될지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비난이 아닌 설득의 전법을 택한 것이다.

 요즘 일본이 노골적인 군국주의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한국과 중국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합헌으로 바꾸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입장엔 흔들림이 없다. 일본의 재무장도 속속 이뤄질 기세다. 방어 위주 전략에선 불필요한 해병대 창설 뉴스가 나왔다. 최첨단 MV-22 수직 이착륙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전환되는 엡실론 로켓의 도입 소식도 들린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인접국에선 군사적 위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국은 일본의 군비 강화에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지난번 대선 때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지난 21일 일본을 방문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지지한다”고 공언했다. 워싱턴의 지한파 인사들조차 “한국은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글을 미 언론에 기고하는 판이다.

 요즘 미국에선 해군을 중심으로 ‘전위 동맹 전략(Forward Partnership Strategy)’이 깊숙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세계 경찰국가의 역할을 버리고 멀리 떨어진 전략적 동맹국의 힘을 길러 이들의 군사력으로 미 국익을 지키자는 논리다. 물론 열악한 재정으로 엄청나게 국방비가 깎이면서 비롯된 고육지책일 수 있다. 이런 판에 일본이 제 돈 들여 재무장하겠다니 미국 입장에선 반가울 것이다. 미국 쪽에선 중국을 견제하는 데 일본만 한 파트너도 없다.

 그러나 새로 도입한 일본의 미사일이 중국으로만 날아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과거 임진왜란에 이어 일제 36년간 일본군의 총칼에 짓밟혔던 한국으로선 그때의 악몽을 떠올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동아시아 역사를 잘 모르는 대부분의 미국인에겐 강 건너 불이긴 하지만 말이다.

 국내 한 언론사의 일본 재무장 뉴스 밑에 여러 댓글이 달렸다. 그중 최다 찬성을 얻은 글의 핵심은 이랬다. “우리의 안위를 위한 핵무장의 당위성이 이제 더 커졌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필연적으로 한·중 양국의 군사력 강화를 부르게 된다. 결국 동아시아 군비경쟁을 촉발하는 건 시간문제다.

 요즘 한·중 사이에 군 고위층 교류는 밀월관계라 해도 좋을 지경이다. 한·중 국방장관 회담은 정례화된 지 오래다. 한국군 인사 중 상당수는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해선 중국 군부가 나서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반면 한·일 간의 군 인사 교류는 미미하기 짝이 없다. 이런 터라 일본의 재무장은 한국군의 중국 쏠림 현상을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아베 총리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 개헌을 서두르지만 많은 일본인은 의문을 표시한다. 요즘 일본의 TV토론에선 “미국이 보호해달라고 한 적도 없고, 안보조약상 의무조항도 아니며, 일본이 받을 대가도 확실치 않은데 왜 개헌을 하느냐”는 질문이 자주 제기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베의 노선에 동조하는 출연자들은 뚜렷한 답변을 못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정부·언론, 그리고 국민 모두 아베의 개헌과 재무장이 궁극적으로 일본에 해가 된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설명해줘야 하지 않을까. 아베 정부와 일본인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악담만 퍼부을 게 아니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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